<걸어서 삼국지 기행 28 후베이성편> 5-2. 형주에 남아있는 관우의 발자취

2012-02-0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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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징저우(荊州)는 관우와 인연이 깊다. 관우는 10년 동안 이곳의 태수로 지내면서 형주성의 기틀을 닦고 백성을 다스렸다. 1800여년이 지난 지금 징저우에는 아직도 관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형주고성 남쪽에 가면 관우를 모셔놓은 사당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형주고성의 남쪽에 위치한 관우사당 '관제묘'

관우가 10년을 지켰던 형주성이 있는 곳인 만큼 이곳에는 본래 관제묘가 6개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 속에 불타고 망가져 지금은 여기 한 곳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곳 관제묘는 과거 관우가 10년 간 형주성을 지켰을 당시에 관우의 관저가 있던 터다. 관우가 죽은 후 징저우 사람들은 관우의 충의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관제묘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관제묘의 정전. 안에는 관우상과 함께 관평과 주창의 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명나라 1396년에 웅대하게 지어져 수 백년에 걸쳐 이어져 내려왔으나 일본 침략 당시 불타 없어져 1987년에 재건했다.

관제묘에 들어서니 사당 내에는 복을 빌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향불 피우는 냄새가 진동한다. 여타 관우 사당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관우에게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로 인파가 가득했다.

과거 중국의 황제는 관우를 문신 공자와 더불어 무신으로 추앙하고 숭배했다.

청나라 건륭황제는 관제묘에 ‘택안남기(澤安南紀)’라는 친필 편액을, 동치황제 역시 ‘위진화하’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안내원은 ‘관우의 은혜가 남쪽 지역 곳곳에 충만하니 남쪽 사람들은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의 택안남기 편액은 모든 관우 사당에서 볼 수 있지만 ‘위진화하(威震華夏·그 위세가 대단해 천하를 흔든다) 편액은 오로지 징저우 관우 사당에서만 볼 수 있는 자랑거리”라고 설명했다.

관우는 또 역대 황제로부터 수많은 작호를 하사 받기도 했다.

안내원은 “관우가 명나라 이후 역대 황제들로부터 하사 받은 작호를 이어 붙여 청말에 이르러서는 작호가 무려 26글자에 달했으니 역대 위인 중 최고”라고 말했다.

정전에 들어서니 높이 3m는 족히 돼 보이는 거대한 관우상이 취재진의 눈에 들어온다. 오른 손에는 전장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공자의 사서(史書) 중 하나인 춘추가 들려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관우가 아들처럼 아끼던 수하 장군 주창이 관우의 무기인 청룡언월도를 들고, 그리고 관우의 아들 관평이 관우의 투구를 들고 늠름하게 서 있다.

관제묘 정전에 모셔져 있는 관우상.


안내원은 “관우와 관평이 손권에게 붙잡혀 참수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창 역시 관우의 뒤를 따라서 맥성에서 자결했다”는 삼국연의 스토리를 들려주니 그 거룩한 충심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관제묘 뒷편에 위치한 한 징저우 중심병원에서도 징저우 사람들의 관우 숭배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화타가 관우의 독화살 상처를 치료했다는 삼국연의 일화를 그대로 재현한 관우와 화타 조각상이다.

징저우 중심병원 에는 화타가 관우의 독화살을 치료했다는 일화를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관우가 과거 번성 공략 당시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아 당대 최고 의사 화타가 칼로 살을 가르고 뼈를 긁어내는 대수술을 했으나 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다.

화타가 칼로 살을 가르고 뼈를 긁어내는 대수술을 하는 도중에도 관우는 눈깜짝하지 않고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잘 표현해냈다.


바둑판 앞에 관우가 오른팔을 걷어붙이고 바둑을 두고 있다. 그리고 관우의 뒤편으로 화타가 관우의 팔뚝을 치료하고 있다. 관우의 표정은 태연하다 못해 늠름하기까지 하다. 눈 하나 찡그리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화타의 시중을 들며 앉아있는 수하가 더 겁에 질린 모습이다.

물론 실제로 화타가 관우를 치료한 적은 없다. 화타는 208년에 사망했고 관우가 번성 공략 당시 독화살을 맞은 것은 그 후로 10년 뒤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관중은 삼국연의에서 당시 최고의 무장 관우와 최고의 의사 화타를 대면시킴으로써 관우의 용맹무쌍한 무사의 기질과 초인적 인내심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징저우 사람들 입에서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일처럼 아직도 회자되고 있었다.

삼국시대 관우는 1800여년 전 이미 죽었다. 그러나 징저우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성인(武聖人) 관우는 ‘신’처럼 18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징저우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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