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렁이' 윤학렬 감독 "'흥행'보다 '문제 제기' 하고파…노출 제안도 거절했다"

2017-05-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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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렁이'를 연출한 윤학렬 감독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 그야말로 지독한 작품이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한 자야와 힘없는 아버지의 분투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영화 ‘지렁이’는 끊임없이 이런 불편함을 파고들고, 집요하게 파헤치며 질문을 던진다. “이래도 가만히 있겠느냐”고.

지난달 20일 개봉한 영화 ‘지렁이’는 청소년 성범죄의 피해를 본 딸 ‘자야’(오예설 분)와 아버지 ‘원술’(김정균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영화 ‘도가니’와 ‘한공주’가 그렇듯 대한민국의 민낯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소년 범죄 피해자 자야가 겪는 악질적 폭력이다. 자야는 가해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당하고 끝내 목숨을 버린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실제 청소년 범죄 피해자들의 사례를 엮어냈다는 점이다. 윤학렬 감독(51)은 참담한 마음으로 하나씩 이야기들을 엮어냈다. “영화의 흥행보다” 작품을 통해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씩, 차근차근 꿰어나간 이야기들은 예리하게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영화 '지렁이'를 연출한 윤학렬 감독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영화 ‘지렁이’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았다. 300분이 넘도록 응원을 해주셨고 6월에는 확대 개봉을 하려고 한다. 액수보다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작품은 생명에 대한 관심, 어른이 가져야 할 관심에 대해 담은 작품이다.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작품에 녹여냈다고 들었다
- 피해 사례들을 엮어내는 과정이 참 지독했다. 시나리오는 3년 전에 이미 나와 있었고 차근차근 피해 사례들을 엮기 시작했다. 현실은 더 잔혹했다. 영화 내에서 제가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고립감과 무너진 자존감을 완벽히 표현할 순 없었을 거다. 거기다 피해 사례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에 아무리 고민해도 수용자가 받아들였을 때 거부감을 느낄 수 있으니. 이에 대한 걱정도 컸다.

그런 마음이 작품 곳곳에 녹아들었나보다
- 어떤 분은 ‘어차피 청불영화인데 노출이나 잔혹한 장면을 극대화 해야 했지 않느냐’고 하셨다. 하지만 저는 수용할 수 없었다. 이미 피해자에 관한 잔혹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흥행을 위해 노출을 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됐다.

극 중 원술 역의 김정균(왼쪽), 자야 역의 오예설[사진=영화 '지렁이' 스틸컷]


극 중 자야가 무너지는 과정이 잘 그려졌다고 본다. 이런 것 또한 철저한 자료조사에서 비롯된 것일까?
- 지금 돌아보니 하나하나 사실이 아닌 게 없다. 많은 이야기 듣고 아이들의 피해 과정에 대해 접했다. 극 중 자야의 상황을 보면 자존감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세상에 반격을 준비하지만,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상대해야 할 기성세대의 벽이 너무 높다는 걸 깨닫고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을 본 뒤 점차적으로 무너진다. 그 뒤부터는 존재감이 사라져버린다. 실제로 극단적 행동을 할 때 ‘라스트 콜링’을 한다. 자야의 ‘라스트 콜링’은 아빠에게 ‘이사 가자’고 제안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아빠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실제 피해 학생들도 이 같은 마지막 몸짓을 한다. 도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이다.

영화 ‘지렁이’는 지난 영화 ‘오! 해피데이’나 ‘철가방 우수氏’의 톤과 완전히 다르다
-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지 않나. 나이가 젊었을 땐 혈기로 더 유명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도달하니 ‘머무는 마음’이 된다. 산 정상도 중요하지만 ‘이 길에 이런 나무가 있었네’하고 바라볼 줄 아는 자세도 중요하다. 그런 마음을 먹게 된 차에 청소년 재단의 이사님을 만나게 됐다. 그분 아드님이 집단 따돌림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꼭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

그렇기 때문에 연출적인 면에서도 고민이 컸던 것 같다
- 극사실주의적으로 다가갔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뭉툭하게 다가갈 때는 테이크를 고민하지 않았다.

배우들을 기용할 때도 그런 부분이 작용했을 것 같다
- 극 중 학생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신인을 기용했다. 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기를 처음 하는 학생들로 구성해 두 달 정도 트레이닝을 시켰다. 실제 사건에 대해 보여주고 토론을 하게 하면서 몰입을 높였다. 예산이 넉넉지 않으니 몰아서 찍게 됐는데 경험이 많지 않으니 감정 흐름을 잘 잡아줘야 했다. 힘들었지만 학생들이 잘 따라와 줬다.

영화 '지렁이'를 연출한 윤학렬 감독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자야 역을 맡은 오예설이 맡은 바 임무가 컸겠다
- 그렇다. (오)예설이의 감정이 어려웠다. 극 중 가해 학생이 집으로 찾아와 폭력을 시작하는 장면이 있다. 얼굴에 침을 뱉는 신인데 그때 (오예설의) 멘탈이 무너졌다. 못 찍겠다고 하더라.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고 예설이를 설득했다. 스태프들도 많은 응원을 보내줬고 박수를 받았다. 이후에는 어려운 장면들을 잘 해내더라.

김정균 배우는 어땠나? 장애인 역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 처음엔 청각 장애인으로 시작했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했는데 김정균과 상의 끝에 뇌성마비로 바꾸었다. 장애를 앓고 있는 친구가 있다며 소개해줬고 그분이 촬영현장에서 내내 연기에 도움을 줬다.

이계인, 이한위, 이응경, 최철호 등 중견 배우들도 특별출연에 기꺼이 응해줬다
- 정말 감사한 부분이다. 특히 이계인 선배님의 경우에는 아주 작은 배역임에도 불구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주셨다. ‘이거 꼭 해야겠다!’면서. 아마 시나리오를 읽고 똑같은 마음을 느낀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화 ‘지렁이’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영화를 끌고 올 수 있던 힘이 있다면?
- 사명감이었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다. 성공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엔딩에 관해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 여러 버전으로 찍었다. 신발이 있는 것, 없는 것, 누워서 찍는 것까지.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다. 결론적으로 선택한 것은 현실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극단적으로는 죽었는지, 아닌지도 의문으로 남길 바랐다. 사실 저는 가해 학생에게 찌를 물리고, 자신의 입도 꿰어버리는 설정으로 찍고 싶었지만, 연기자, 촬영감독들까지 만류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극 중 원술 역을 맡은 배우 김정균[사진=영화 '지렁이' 스틸컷]


방관자라는 개념의 ‘지렁이’를 원술에게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그렇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수렴했고 방향을 바꾸게 됐다.

앞서 언급한 6월 초 확대 재개봉 이야기는 무엇인가?
- 6월 초 확대 재개봉을 하려고 한다. 현재 너무 관이 적어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분들이 계신다. 재개봉을 하려면 2억 원 상당의 마케팅비가 필요하다. 그래도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다. 주제가 분명하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가능할 거라고 본다. 100개 관 정도 확대 재개봉될 예정이다. 이를 위해서 투자를 여러 라인으로 의뢰할 계획이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사회적 문제를 다룬 만큼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5월 9일 대선을 앞둔 상황이다. 많은 문제가 있다. 북한 핵 문제, 사드, 소녀상 문제 등등. 하지만 장애인 차별 문제, 청소년 범죄 등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나라의 지도자가 되시는 분께서 이 작품을 보고 이 문제에 힘을 실어주시길 바란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까?
- 여러 가지 고민 중이다. 국민들이 지쳐 하는 상황이니 코미디를 만들지, 인권 문제를 파고들어야 할지. 최근 탈북 여성들의 생활고에 대해 들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더라. 탈북한 여성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심도 깊게 다루고 싶다.

영화 '지렁이'를 연출한 윤학렬 감독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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