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꿈을 찾아 한국에 갑니다” 패션디자이너 황원어의 ‘이유있는 성공’

2017-06-2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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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화보 장진원(張勁文) 기자 =광저우(廣州)에서 서울로, 다시 광저우로…
의상 디자이너 황원어(黃文鍔)의 ‘한국행(行)’은 배움과 성장을 위해 한국 의상의 발원지로 떠나는 ‘성지순례’일 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기 위한 자아수행의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한류바람이 불고 한국 스타일의 의상이 중국 국내 디자이너들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을 때, 황원어가 마음에 새긴 것은 자신이 배워온 의상 디자인 기술이 아닌, 한국의 스승과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진지함과 세심함이었다.
지난 3월 24일부터 4월 1일까지 개최된 ‘2017년 중국 국제 패션위크’에서 황원어는 자신이 디자인한 ‘미스 레이스(Miss Lace)’의 최신 의상과 함께 나타났고, 그의 의상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한국에서 배워온 기술과 열정적인 태도, 그리고 스스로의 영감과 노력으로 황원어는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창조해냈다.

의상 디자이너로서의 시작
황원어는 광둥(廣東)성 차오저우(潮州)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옷과 깊은 인연을 가진 도시로, 중국 4대 명수(名繡, 자수로 이름난 곳) 중 하나이자, 밍루이(名瑞)그룹·진차오(金潮)그룹 등 유명 의류기업이 밀집해있는 곳이기도 하다. 방직업과 의류제조업은 차오저우시에 발전의 날개를 달아주었으며, 국제 패션과 유행에도 민감한 후각을 갖게 해주었다.
가족들이 자수공장을 운영한 것도 황원어가 의류에 큰 관심을 갖게 된 배경 중 하나다. 2004년 수험생이었던 그는 화난(華南)농업대학교 예술학원 의상학과에 지원했다. “화난농업대학교 의상학과는 광둥성 전체 대학의 의상학과 중 수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나처럼 의류업계에 종사하기를 꿈꾸던 학생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무대 중 하나다.”
많은 학생들은 대학생활이 여유롭다고 하지만, 황원어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수업이 없을 때는 각종 디자인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도전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더욱 알차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전정신은 그로 하여금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난제들에 직면하게 했다. 그는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원단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디자인 제판, 공예 처리 등등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어려움이 대회 참가의 이유이자 그러한 과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었다. “대회에 참가하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책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다. 대학시절 나는 거의 매 학기마다 한 개 이상의 대회에 참여했다.”
많은 수상 경력을 가진 그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2007년 받은 ‘중화컵(中華杯) 국제 의상디자인대회(이하 중화컵)’에서 받은 동상이다. 벌써 10년이 지났음에도 황원어는 당시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중화컵’은 국제적인 디자인 대회이고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그 당시 나는 해외에서 온 참가자들의 디자인 방식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디자인이 과감하거나 콘셉트가 뚜렷한 것 등 작품마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었다.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진다면 새로운 트렌드가 될만한 그런 스타일이었다.” 많은 국내외 경쟁자 사이에서도 황원어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2007년 내 작품은 상당히 시장 니즈에 부합했다. 실용적이면서도 포인트를 살린 디자인이었다.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옷의 통일감, 강한 실용성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심사위원들 역시 작품을 바로 판매해도 될 것 같다고 평가했었다.”
 

패션디자이너 황원어[사진=황원어 제공]


도약을 위해 서울로 가다
2007년 ‘중화컵’에서 동상을 수상한 뒤 황원어에게는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될 기회가 찾아온다. ‘형제컵(兄弟杯) 국제 청년 의상 디자이너 작품 대회’ 발기인인 리신(李欣)의 추천으로 에스모드 서울(ESMOD SEOUL)의 장혜린 당시 교장과 만나면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에스모드 석사 연구생 장학금을 얻게 된 것이다. 2009년 에스모드 서울 입학을 계기로 황원어는 한국에서의 공부와 일을 시작하게 된다.
에스모드는 ‘의상 디자이너들의 하버드 대학’으로 불리는 명문 학교다. 에스모드 서울에서 공부하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던 여러 교수님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에스모드 서울의 박윤정 이사장이었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옷을 입는 스타일, 품위는 최고였다. 내가 가장 놀란 사실은 박윤정 이사장께서 1980년대 한국에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선보이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서 센세이션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이든 과감하게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9년은 한류 인기가 상당하던 때였다. <미남이시네요> 같은 한국 드라마에서부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 한국 아이돌그룹이 큰 사랑을 받았고, 그와 동시에 한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국 스타일의 옷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되면서 많은 젊은이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황원어는 이 같은 변화에 주목했다. “2009년 당시 중국 시장은 한국 옷에 열광했다. 그런 현상에 호기심을 가졌던 나는 한국 옷의 정수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원어는 공부하는 틈틈이 한국 옷의 집산지인 동대문 시장을 찾았고, 한국 옷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황원어가 보기에는 중국인 체형을 고려했을 때 중국 공장에서도 얼마든지 비슷한 옷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옷이 그토록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독특한 디자인과 제작방식 때문이었다. “한국 옷은 디자인에서부터 입는 사람의 체형에 대해 세심하게 고민한다. 원단에 있어서도 한국 브랜드는 편하면서도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즉, 입었을 때 편안한 것뿐만 아니라 세탁에도 강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늘어나지 않고 쉽게 변형되지도 않는 원단이어야 한다. 좋은 디자인에 좋은 소재까지 더해지니 편하면서도 멋이 날 수 밖에 없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 황원어는 한국 의상 디자인 표준의 엄격함을 배웠고, 무엇보다 한국 디자이너들의 진지한 태도와 책임감을 체득할 수 있었다. “에스모드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교수님들의 투철한 직업 의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mm만 오차가 생겨도 재단부터 재봉까지 다시 해야만 했다. 새벽 2, 3시까지 과제를 하고서 다음날 7시면 일어나 수업을 들으러 갔었다.” 교수님들의 엄격한 지도 덕분에 황원어는 최고 수준의 옷본 제작 및 재봉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관련 과목 성적 또한 입학 당시 B에서 A+까지 올랐다. “힘들기는 했지만 당시의 경험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2009년 12월. 황원어는 한국 패션의류전문업체 보끄레머천다이징의 의류브랜드 온앤온(on&on)에 입사했고, 3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2010년 4월에는 보끄레 산하의 또 다른 브랜드 더블유 닷(W.DoubleuDOT) 상하이 분사로 자리를 옮겨 정식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보끄레에서 일하면서 황원어는 한국 의류기업의 세밀함을 온몸으로 배웠다.
“상하이 분사에서 자켓을 제작하던 때의 일이다. 홍콩에서 가져온 원단을 사용해야 했는데, 거래처 직원이 중국어를 못해서 마침 광둥 출신이었던 내가 거래처와 연락을 담당하게 됐다. 원단이 홍콩에 도착하는 시기부터 관세, 원단 컬러, 수량까지 모든 것을 확인하고 최종 마무리까지 책임져야 했다.” 계약 전반을 책임지면서 황원어는 더블유 닷의 엄격한 경영이념을 알게 됐다. “중국 국내기업이었으면 계약서 몇 장이면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더블유 닷에서는 빼곡하고 세세하게 각종 수치들을 적어야 했다. 원단 종류가 몇 가지인지, 원단 별 수량은 얼마나 되는지, 옷 한 벌에 들어가는 양은 얼마나 되는지 모두 기록해야 했다. 심지어 여러 가지 컬러가 사용되는 옷에는 어떤 재질의, 어떤 컬러의 실을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바느질 방식을 사용할 것인지, 한 땀 간격을 어느 정도로 할 지까지 기록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지퍼의 브랜드, 모델명, 컬러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어야 했고, 디자인 한 개마다 3개 이상의 옷본을 떠서 완벽성을 높여야 했다.” 황원어는 존경스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철저한 일 처리 방식은 분명 내 사업에, 심지어 내 생활습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에스모드 서울(ESMOD SEOUL) 졸업 당시의 졸업작품 [사진=황원어 제공]

황원어가 디자인한 미스 레이스(Miss Lace) 의상은 ‘변경예술’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사진=황원어 제공]


레이스와의 인연, 새로운 디자인들
2011년 오래도록 떠나있던 광저우로 돌아온 그는 트렌디 인터네셔널 그룹(Trendy International Group)의 파이브 플러스(five-plus)에서 5년간 일하다가 2016년 중국 로컬 여성의류업체인 미스 레이스로 자리를 옮긴다. 미스 레이스는 레이스를 테마로 한 브랜드로, 한국 의상과는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다. 황원어는 그러나 미스 레이스를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으며,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디자인을 한 가지 스타일에 국한하고 싶지 않을 뿐, 한국에서 배우고 실습했던 경험은 그에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핏 디자인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에스모드 서울에서 공부할 때나 한국 의류업체에서 실습할 때나 항상 옷의 핏을 살리는 데 더 집중하곤 했다.” 디자인과 관련한 1차 자료를 얻기 위해 온앤온에서의 실습기간 동안 황원어는 샘플실과 공장 견학을 자청했고, 이러한 노력은 그가 인체에 맞는 원단을 고르고 선택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미스 레이스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도 황원어는 디자인과 원단의 합리적 운용을 강조한다. 그는 또 효과 이미지 상의 선 한 줄이 화룡점정이 될 수도 있고 전체를 망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레이스 디자인은 더더욱 그렇다. 레이스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인체의 곡선을 드러내야 한다. 액세서리를 달 최적의 위치를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다행인 것은 미스 레이스에선 레이스 디자인을 연구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한 디자인을 만들고 거기에 여러 가지를 더해본 뒤 옷의 완성도를 높인다.”
디자인과 원단의 합리적 운용을 강조함과 동시에 황원어는 새로운 디자인을 과감하게 시도함으로써 레이스 사용의 한계를 깨뜨렸다. 기존에는 레이스 디자인이 다소 단순했던 것이 사실이다. 왕실 귀족 옷에나 사용되던 고급 원단에서 점점 웨딩드레스나 예복 장식용 원단으로 쓰이다가 일반 패션에까지 활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때문에 레이스가 주는 이미지는 성숙함에 고정되어 있었다. 황원어는 그러나 그러한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지금은 바링허우(八零後, 1980년대 출생자)·주링허우(九零後, 1990년대 출생자)의 시대다. 25-35세들이 주요 세대다. 우리 옷은 심플하면서도 젊은 패션을 추구한다.” 올해의 중국 국제 패션위크 기간, 미스 레이스 역시 베이징 798의 B12 전시부스에서 최신 디자인을 선보였다. 전통미와 현대적 아름다움을 결합함과 동시에 심플한 디자인으로, 레이스 자체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동시에 우아하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았다. “미스 레이스의 옷은 예술과 시장의 경계에 있다. 특징이 뚜렷하지만 실용도도 높다.”
우수한 디자이너의 조건은 무엇일까? 뛰어난 디자인 실력뿐만 아니라 창의력과 영감 또한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내 아이디어는 성격과 취미에서 나오는 것 같다.” 외향적 성격의 그는 더 넓은 세계에서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여행과 사진촬영을 좋아한 덕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이러한 습관과 취미는 그의 삶과 일에 많은 놀라움을 만들어준다. “한번은 교외로 나갔다가 잘 보이지 않는 골목길을 지나가게 됐다. 좁은 골목길 한쪽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해있고, 다른 한쪽에는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낡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낡은 건물의 벽면 가득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상반된 이미지가 내 머리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나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그때 나는 ‘변경예술’이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수정작업을 거친 뒤 디자인을 통해 미스 레이스의 2017년 SS시즌 의상에 반영했다.”
미스 레이스를 해외에 선보이고, 해외에서 패션쇼를 열고 싶다는 게 황원어의 바람이다. “분명히 쉽지 않을 것이다. 브랜드 포지션을 생각하면 제품 품질을 더욱 끌어올려야 하고, 원단을 생각하면 세계 최고 품질의 레이스 생산업체와 협력을 맺어야 한다. 우수한 디자이너와 기술자들이 모여야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다.” 그런 그가 인생 최초의 해외 패션쇼 개최지로 서울을 선정했다. “나를 가르쳐주신 은사님들께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드리고 싶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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