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네이롄성(內聯升), 164년 역사의 신발가게

2017-08-0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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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첸먼 다스란에 위치한 네이롄성 점포[사진=인민화보 완취안(萬全) 기자]


인민화보 장진원(張勁文) 기자=베이징의 역사 유적을 꼽자면 자금성(紫禁城), 만리장성(萬里長城), 이화원(頤和園) 같은 황가의 유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 베이징의 시정(市井)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첸먼(前門) 다스란(大柵欄)에 가보는 것이 좋다. 거리는 이미 새롭게 단장됐지만 거리 옆에 빽빽하게 들어선 노포(老鋪)들을 둘러보면 머리에는 마쥐위안(馬聚源) 모자를 쓰고, 발에는 네이롄성을 신고, 몸에는 바다샹(八大祥)을 입고, 허리에는 쓰다헝(四大恒)을 두른 중화민국 초기 부자들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라오쯔하오(老字號)는 저마다 역사가 있다. 네이롄성도 예외가 아니다. 청나라 말부터 지금까지, 조정에서 신던 신발인 조화(朝靴) 맞춤제작에서 패션 슈즈까지, 네이롄성은 164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면서 중국 상업계의 전설을 썼다.

‘가마 탄 사람’을 주고객으로
네이롄성은 청나라 함풍(咸豊) 3년(1853년) 문을 열었다. 네이롄성의 창업자인 자오팅(趙廷)은 톈진(天津) 우칭(武清)현 사람으로 어릴 적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12-13살 때 부모가 그를 베이징 둥시파이(東四牌)로 근처의 한 신발 가게로 보내 실습생으로 일하도록 했다. 자오팅은 기술을 배우는 기간 동안 인생을 바꿔줄 인물인 딩(丁) 장군을 만났다. 자오팅의 수제화 기술과 경영 마인드를 높이 산 딩 장군은 자오팅에게 황성 근처에 수제화 상점을 내보자고 제안했다. 딩 장군이 은 1만냥, 자오팅이 1천냥을 출자해 둥자오민항(東交民巷) 골목에 네이롄성 신발 가게를 설립했다.
1853년의 둥자오민항 골목은 아직 대사관 지역으로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관공서와 관료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경영에 능한 자오팅은 둥자오민항 골목에서 자리잡으려면 ‘가마 탄 사람’을 타깃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오팅은 딩 장군을 통해 조정 관리들을 소개받았고 그들이 기존 조화(朝靴) 가게에 불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자오팅은 조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네이롄성’이라는 상호도 관료들이 좋아했다. ‘네이(內)’는 다른 말로 황궁을 뜻하고 ‘롄성(聯升)’은 이 가게 신발을 신으면 관운이 형통해 연속 3급이 오른다는 뜻이었다. 상서로운 상호에 딩 장군의 수완이 더해져 네이롄성은 짧은 시간 안에 유명해졌다.
네이롄성 조화가 고관과 귀인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조화를 구입하거나 맞추려는 관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상업용 VIP 고객 리스트가 탄생했다. 고관 귀인에 대한 서비스 품질을 높이기 위해 자오팅은 관료들의 신발 치수, 맞춤 스타일, 고향, 주소, 심지어 특별한 기호까지 일일이 기록해 <이중비재(履中備載)>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관료들은 신발이 필요하면 네이롄성으로 사람을 보내 통보했고 그러면 네이롄성이 알아서 제작해 배달해주었다. 네이롄성과 <이중비재>가 중국 상업계의 고급 맞춤 제작의 새 장을 연 것이다.
 

네이롄성 천층저 헝겊신은 제작 공정이 매우 까다롭다. 네이롄성 천층저 헝겊신 제작 기술 국가급 무형문화재 계승자인 허카이잉은 일반적인 ‘일자 신창’ 한 쌍에 2100땀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사진=인민화보 완취안(萬全) 기자]


‘천층저 헝겊신’으로 돌파구를 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수천년 중국 봉건제도가 막을 내렸다. 이것은 네이롄성에게 치명타였고 자랑으로 여기던 조화를 신는 사람도 사라졌다.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네이롄성은 획기적인 제품인 ‘천층저(千層底) 헝겊신’을 출시했다. 이 신발은 중화민국 초기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네이롄성의 대표 제품이다.
2009년 네이롄성의 천층저 헝겊신 수공예 제작 기술이 국가 제2차 무형문화재 목록에 편입됐다. 천층저 헝겊신 기술은 90여 공정과 30여 공구를 아우른다. 네이롄성 천층저 헝겊신 제작기술 국가급 무형문화재 계승자인 허카이잉(何凱英)은 네이롄성 천층저 헝겊신의 제작 공정이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이 ‘천층저’를 보세요. 성냥갑 크기만한 1평방촌에 바느질이 81땀이나 들어갑니다. 또 가로 세로 대각선이 고르게 열을 이루며 조금도 흐트러져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인 ‘일자 신창(一字底)’ 한 쌍에 2100땀, ‘십자 신창(十字底)’ 한 쌍에는 4200땀이 들어갑니다.” 신발 밑창을 몸통에 붙일 때 허카이잉은 등받이가 없는 작은 걸상에 앉아 몇 시간씩 앉아서 규칙에 따라 한땀 한땀 꿰맨다. 허카이잉은 계승자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 그는 “문화유산이 내 대에서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청쉬(程旭) 베이징 네이롄성 신발유한공사 부총경리도 같은 생각이다. “국가급 무형문화재 목록에 오른 것은 영광으로, 독창적인 기술과 유구한 역사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기술이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 공예 기술을 보호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중국인의 일상생활 속에 녹아들게 하는 것”이라며 “전통 기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시장 수요에 부합하는 디자인의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13년, 상호 창립 160년을 맞아 네이롄성은 베이징 궁왕푸(恭王府)에서 런칭쇼를 열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배경으로 관객에게 100여 개의 신상품을 선보여 전통 공예와 트렌디한 예술이 결합된 시각의 향연을 선사했다.
 

2011년부터 네이롄성은 톈마오와 징둥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개설했다. 이는 시장 개척의 또 하나의 ‘무기’가 됐다. [사진=인민화보 완취안(萬全) 기자]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네이롄성 헝겊신의 편안함과 품질을 아끼는 단골 고객이 있다.[사진=인민화보 완취안(萬全) 기자]


온라인마케팅 등 전환의 길
80년대, 개혁개방의 바람이 중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네이롄성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청쉬 부총경리는 “개혁개방 전에는 노인들이 거의 다 신발을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 민간의 수공예 신발은 생산원가가 높아져 기계화된 생산이 대신하게 됐고 시장에서 점점 주변화됐다”고 말했다.
시장 흐름에 부합하기 위해 네이롄성도 운동화, 가죽신발 생산을 시도했다. 그러나 남쪽 지역의 광둥(廣東)과 저장(浙江)의 가공공장에 비해 네이롄성이 만든 가죽신발은 특색이 없었고 효율 면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졌다. 10여 년 동안 부진과 시장 불황을 겪다가 2000년 초 국유기업 개편 이후 네이롄성은 마침내 자신의 경영 방향을 찾았다. 바로 수공예 헝겊신을 주력 상품으로 하는 경영 모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네이롄성의 타깃은 여전히 중고급 시장이다. 과거에는 ‘가마탄 사람’을 위해 서비스했다면 지금은 공무원, 공직자, 학자, 연예계 인사가 주 고객층이다. 효율 면에서 기계화 제품과 경쟁할 수 없다면 공예 면에서 뛰어나야 한다.”
개편 이후 네이롄성은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온라인 마케팅을 적극 모색한 것이다. “2008년 홈페이지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위탁판매 고객들이 ‘타오바오(淘寶)’에 상점을 개설한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2009년 네이롄성은 전자상거래를 하는 위탁판매업체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쉬 부총경리는 인터넷 쇼핑몰 상황을 조사한 뒤 2010년 네이롄성 홈페이지에 단독 쇼핑몰사이트인 ‘상뤼상청(尚履商城)’을 오픈했다고 소개했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의 1년 매출은 약 100만 위안(약 1억6600만원) 정도다. 반면 유지 비용은 1-2만위안 정도로 적게 든다.”
2011년부터 네이롄성은 톈마오(天貓)와 징둥(京東)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개설했다. 이는 시장 개척의 또 하나의 ‘무기’가 됐다. 하지만 청쉬 부총경리를 제일 기쁘게 한 것은 타오바오에 출시한 <대어해당(大魚海棠)> 시리즈다. “2016년 7월, 중국 애니메이션영화 <대어해당>이 개봉할 때 네이롄성은 관련기업과 지식재산권 대리권리 협력을 맺고 신제품 <대어해당> 시리즈를 출시했다. 크라우드펀딩 단계에서만 매출액 40만 위안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대어해당> 파생상품 가운데 1위였다.”
청쉬 부총경리는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업체에 추월당했다. 수공예로 생산하기 때문에 생산력에 한계가 있어 더 많은 주문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이롄성은 컨텐츠 혁신 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드는 수공예품으로 소비자의 수요를 어떻게 만족시키느냐 라는 또 하나의 과제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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