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의 음악이야기] 드뷔시와 텐거의 바다 인상

2017-08-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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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와 텐거의 바다 인상

[사진=정병욱]



장면 1.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의 한 살롱에서 회화 작품발표회가 열린다. 낭만의 시대를 살아온 비평가는 출품작을 보고 "회화의 전통을 무시하고, 사물의 순간적인 인상에만 관심을 두었다."며 야유를 퍼붓는다.
장면 2.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에서 팝음악, 록음악의 전성기를 지나온 평론가가 "전자음악과 힙합은 창작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샘플링과 오토튠에만 관심을 둔다."며 현실을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 당대 음악은 그저 싸구려 음악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사랑받는 이유는 단지 과거의 것에 저항하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무지 때문이다.
매서운 더위를 이겨줄 바다를 그리워 하다가 바다를 듣는 것으로 마음을 위로하고 드뷔시(Claude Debussy)의 '바다(La Mer)'를 들었을 때 문득 위 사유가 이어졌다. 두 장면은 각기 흔히 아는, 혹은 있을 법한 하나의 가정이며 다른 시대와 장르의 상황이지만 왠지 비슷한 감상을 전해준다. 장면 속 기 전통에 입각한 비평의 시선과 지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역사 가운데 늘 비슷한 진통과 부침을 겪으며 새로운 양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상기했을 따름이다.

'바다'를 작곡한 드뷔시는 음악에 인상주의를 대입해 20세기 어제의 현대음악을 대표하게 된 작곡가다. 회화의 인상주의가 물체 고유의 형태와 색 대신 자연의 빛과 바람에 끊임 없이 흔들리는 대상의 인상을 불분명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한 것처럼, 드뷔시의 인상주의는 그림의 색채와 색조에 해당하는 음악의 선율과 조성을 해체하여 모호하고 환상적인 소리의 몽상을 그려냈다. 사실 바다를 음악으로 표현한 전례는 바로 앞선 낭만주의 대가의 곡들만 훑어도 무수하다. 그러나 선배들이 바다의 구상(具象)이나 관련 줄거리를 뚜렷한 감각과 과장된 정서의 표제로 서술했다면, 드뷔시의 바다는 전통적인 조성을 해체했고, 악기들을 물리적 구분이 아닌 음색에 따라 이합집산했으며, 주제를 선형적인 선율로 제시하기보다 소리의 캔버스를 채워내는 선율미로 대체함으로써 머리와 마음으로 그리는 언어의 바다가 아닌 소리가 그리는 바다를 완성했다.

드뷔시의 '바다'로부터 112년이 지나 전자음악 듀오 텐거(TENGGER)가 그리는 바다는 오늘의 인상주의 작품으로 불릴 만하다. 물론 이들은 과거 그들이 텐거의 전신인 텐(10)이었던 시절에도 정상적인 가사나 선율을 기대할 수 없는 충분히 개성 강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했다. 하지만 지난 6월 닷새간 5개의 앨범으로 연달아 온라인에 공개한 텐거로서의 그간의 작업에서는 텐 시절과 또 달라진 파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대로인 것은 소리에 대한 관심이다. 지난 텐의 음악이 전자악기가 만들고 조합하는 각종 신선한 소리에 천착했던 것처럼, 텐거의 노래 역시 소리를 아날로그적으로 변형하는 일종의 무지 콩크레떼(Musique concrète) 방식으로 비(非)악기적 소리를 적극 차용한다. 가사도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징적이고 반복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달라진 것은 전체 인상을 그리는 방식이다. 텐이나 당대 많은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실험이 기괴하고도 짧은 프레이즈의 반복과 발전으로 분명한 선형진행을 담보했다면, 텐거는 들리는 소리의 인상을 훨씬 긴 호흡으로 연장하여 하나의 노래 속에서도 먼저 들은 감상의 인상과 이후의 인상의 시점을 뒤섞는 하나의 환상으로 융합한다. 텐거라는 팀 이름부터가 몽골어로 “경계가 없이 큰 하늘”을 뜻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 표현이 우연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에 공개된 앨범 ‘TENGGER (II)’에서는, 각 싱글의 제목이자 키워드인 ‘Oneul(오늘)’, ‘Grosses Wasser(바다)’, ‘Sum(숨)’ 등을 합친 노랫말 ”오늘이 오고, 숲이 눈앞에. 바다가 들려오고, 숨도 따라오고”가 노래마다 똑같이 등장하고 계속 반복되어 싱글 단위를 벗어난 거대한 자연과 바다와 인상을 지속한다. 노래에 따라 때로 10분, 15분도 넘어가는 러닝타임을 마치 롱테이크 장면처럼 단일한 긴 호흡으로 활용해 지긋하고 정밀하게 설득하는 텐거의 작법은, 감상이 현재의 객관적 감각에 머무르지 않고 훨씬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인상주의적 감상을 허락한다.
이들의 정규앨범 ‘TENGGER (I)’와 ‘TENGGER (II)’의 아트워크가, 인상주의 회화작품들과 드뷔시에게 영감을 주었던 일본 에도시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의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神奈川沖浪裏)‘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나 여타 아트워크 및 ‘Pure Land’, ‘Land of Bliss’, ‘Videy’, ‘Aurora’, ‘Badapado’ 등 언급되지 않은 수록곡에서도 대자연과 바다에 대한 인상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 등은 텐거를 오늘날의 인상주의로 연관 지어도 좋을 그 밖의 근거이다. (https://youtu.be/sGQjmln2dIc 텐거 ‘오늘’ 뮤직비디오)
과거 인상주의의 변화된 기법은 20세기라는 새로운 시대가 음악을 만들고 들음에 있어 보다 적극적인 태도와 소양을 취할 수 있게 하였다. 작금의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급변하여 새로운 관점과 기술이 끊임없이 창조된다. 늘 익숙한 즐거움과 전통 미학에 머물러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 때로는 스스로에게 파격적인 감상으로 새로운 인상을 남겨보는 것도 답답한 한여름을 통과하는 시원한 피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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