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5] 영웅의 어린 시절은? ②

2017-08-0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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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씨족간 연합 노린 조혼(早婚) 시도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아내 호엘룬의 친정이자 옹기라트씨족의 일파인 올쿠누우드족(族)에서 테무진의 아내를 구할 셈이었다.
초원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시기에 세력도 크고 평판도 높은 옹기라트族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한다는 것은 높이 날 수 있는 날개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진 = 다달솜에서 옹기라트까지]

그래서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데리고 옹기라트족이 사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났다.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리고 그의 미래의 처가를 찾아가는 여행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직접 취재를 위해 이 길을 따라가면서 이때야말로 아버지 예수게이는 아들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가르침을 준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옹기라트씨족은 지금 외몽골의 국경선 바깥에 있는 중국의 내몽골지역 훌룬호(Hulun Nor) 근처에 살고 있었다.
델리운 볼닥에서 훌룬호까지는 직선거리로 5백 킬로미터가 넘는 먼 길이다.
옹기라트씨족이 사는 곳에 이르는 부자(父子)의 여행은 적어도 일주일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거친 초원과 늪지대, 여러 강을 건너며 이어진 이 여행은 며칠 동안 황량한 초원에서 노숙을 하면서 이어졌을 것이다.

델리운 볼닥 주변만 보고 살아왔던 어린 테무진에게 새롭게 펼쳐지는 대평원과 그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어렵게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모습은 분명히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 줬을 것이다.
또한 거친 평원과 한없이 넓은 세상은 그에게 새로운 포부를 갖게 만들어 줬는지 모른다.

더욱이 예수게이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많은 얘기들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목을 길러 줬을 것이다. 선조 보돈차르의 얘기에서부터 조부 카불칸에 이르는 몽골족의 유래에 관한 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 종족들 간의 역학 관계와 주변 나라의 정세도 일러줬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살아온 과정과 전투에서의 무용담도 들려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취할 자세와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포용력,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 그리고 적에게 취할 태도 등도 가르쳤을 것이다.

[사진 = 초원의 아버지와 아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이 긴 여행은 어린 테무진에게 무엇에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 나중에 테무진이 여러 어려운 상황을 딛고 초원의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는 바탕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맡기고 혼자서 돌아가던 길에 예수게이는 그의 생을 마감함으로써 아들과의 이 여행은 사실상 이별 여행이 되고 말았다.

▶ 테무진과 부르테의 약혼
이들 부자는 며칠간의 여정을 거쳐 케룰렌강이 훌룬호로 흘러 들어가는 유역에 도착했을 때 옹기라트씨족의 데이세첸을 만나게 된다.
예수게이가 아들의 색시를 구하기 위해 올쿠누우드에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 데이세첸은 테무진을 보고 한눈에 반해 사위로 삼기 위해 나섰다.

"당신의 아들은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아이입니다. 예수게이 사돈, 지난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흰 해동청(海東靑;송골매)이 해와 달을 움켜쥐고 날아와 내 손에 앉았습니다. 꿈 해몽을 시켰더니 비길 데 없는 길조(吉兆)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꿈을 당신이 아들을 데리고 올 때 꾼 것입니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내 딸은 어립니다. 당신에게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하며 이들 부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사진 = 부르테 추정도]

데이세첸의 딸을 보니 얼굴에는 빛이 있고 눈에는 불이 있었다. 예수게이가 마음에 들어 한 이 처녀는 테무진 보다 한 살 위인 열 살로 이름은 부르테였다.
예수게이는 부르테를 며느리로 맞겠다는 뜻을 밝히고 자신의 예비마를 예물로 준 뒤 테무진을 사위로 맡기고 돌아갔다.

▶ 아버지 예수게이의 죽음
아들을 사돈집에 남긴 채 홀로 되돌아가던 예수게이의 귀로 여행은 그러나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운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게이는 돌아가는 길에 시라 케에르 대평원에 도착했을 때 타타르 사람들이 잔치하는 것을 보고 목이 말라 말에서 내렸다.
 

[사진 = 몽골 대평원]

그 타타르인들은 예전에 약탈당한 일을 떠올리고 그 때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몰래 독을 섞은 마유주(馬乳酒)를 그에게 주었다.
사흘 낮 밤을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게이는 몹시 위독해졌다.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감지한 예수게이는 동생들에게 조카와 과부 형수를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하고 빨리 가서 테무진을 데려오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

초원에서 여행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전혀 낯선 사람에게도 적용됐고 심지어는 적에게도 적용이 됐다.

칭기스칸 시대의 법이나 마찬가지인 대 자사크는 이와 관련해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의 옆을 지나가는 손님은 말에서 내려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그 음식물을 먹을 수 있다. 주인은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의 오이라트 법령집은 보다 구체적이어서 목마른 사람에게 아이락(馬乳酒: 말 젖으로 만든 술)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 양 한 마리를 벌금으로 부과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음식 인심이 후하기 때문에 길을 나서는 사람은 먹을 것을 크게 걱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타타르인들은 초원의 관습을 파기하는 비겁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게이도 옹기라트씨족이 타타르족과 인접해 살고 있고 그 곳에서 돌아가는 길에 적대 관계에 있는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을 너무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 시라 케에르 대평원]

예수게이가 타타르인들을 만났다는 시라 케에르 대평원은 지금 몽골의 제 4도시 초이발산(Choybalsan)에서 동북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그곳에서 중국과의 국경선까지는 50Km 전후이고 국경선을 너머 50Km 정도 더 동쪽으로 가야 과거 옹기라트 씨족이 살았던 곳이 나온다.

초이발산을 출발해 지도의 좌표를 따라 시라 케에르 대평원을 찾았다.
이곳으로 가는 초원도 인적이 드문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십Km를 달려야 겨우 한 두 채의 게르(유목민 천막)를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두 시간 남짓 달려가 대평원 한 가운데 멈춰서 지도를 보니 대략 그 근처를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을 만났던 시라 케에르 평원인 것 같았다.

동행한 몽골 국립문서보관소 소장이자 역사 지리학자인 게렐 바트라흐도 그 지점이 맞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표식이 없고 인적마저 없는 상태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역사의 넓은 무대를 눈으로 확인한 것으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자위하며 초이발산으로 되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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