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적시(適時)

2017-08-17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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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세상만사 '타이밍'(timing)이다. 빨라도, 늦어도 안 된다. 지구상 모든 생물은 따지고 보면 타이밍의 승리자이다. 공룡은 6500만년 이전에 나타나는 바람에 멸종했다. 포유류는 이른바 'K-T대멸종' 이후 번성했다. 덕분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기회도 그렇다. 살다 보면 수많은 기회가 화살처럼 지나간다. 이때 손을 너무 일찍 뻗으면 화살에 관통된다. 화살은 잡지 못하고 피만 흘린다. 늦으면 허공만 잡을 뿐이다. 바로 실기(失機)다. 훌륭한 아이디어가 빛을 보지 못한 이유는 너무 빨랐거나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말했다. 지켜보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때가 있더라는 것이다. 날 때와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심은 것을 뽑을 때 너무 빠르면 쭉정이를 수확할 뿐이요, 늦으면 참새의 만찬 이후 남겨진 찌꺼기뿐이다.

솔로몬은 덧붙인다. "지킬 때와 버릴 때가 있고, 찢을 때와 꿰맬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와 화평할 때가 있다." 적시(適時)에 행해야 알맞게 이뤄지는 것이다. 벼도 빨리 자라라고 이삭을 당겨 올리면 '조장(助長)'이다.

인생은 그래서 타이밍이다. 홍안(紅顔)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면 오히려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 물정을 알기도 전에 세상 일을 재단해야 하는 것이다. '소년 급제'가 '중년 상처', '노년 무전'과 함께 남자의 세 가지 불행에 속하는 이유이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도 타이밍의 게임이 돼버렸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던 옛날에는 제한시간 규정도 없었다. 그런 것이 이틀, 하루로 줄다 10시간, 7시간, 5시간, 4시간으로 줄었다. 이마저도 '속기'의 유행 속에 1시간에 승부를 낸다.

2015년 7월 26일 한국기원에서 현대 바둑 7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조훈현과 조치훈의 대국도 타이밍이 승부를 갈랐다. 제한시간 1시간을 다 쓴 조치훈 명인이 마지막 초읽기에 착점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는 계시원이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하고 셀 때 "열!"에서 둔 것이다. 규칙은 "아홉!" 이전에 두어야 한다. 결국 조치훈의 '154수 시간 패(敗)'로 기록됐다. 타이밍에 실패한 것이다.

바둑뿐이랴. 모든 게임의 승패는 타이밍이 가른다. 야구에서 안타 수가 같아도 점수 차이가 나는 것은 '적시(適時) 안타' 때문이다. 2사 만루에서 안타 한 방은 주자가 없을 때 홈런보다 더 가치가 있다. 축구에서 추가시간의 한 골, 농구에서 버저비터는 가혹한 운명의 타이밍이다.

경기뿐이랴. 기업의 존망도 타이밍에 달렸다. 필름 시장을 석권했던 코닥은 사라졌지만, 후지필름은 디지털 영상처리 쪽으로 임기응변해 살아남았다. 보급형 카메라 시장은 한때 니콘이 주름잡았으나, 디지털 시대에는 캐논이 발 빠르게 대처했다. 핀란드의 노키아도 스마트폰 시대에 대처하는 타이밍을 놓쳐 사라졌다.

불과 수년 전이다. 기업인 조찬 모임의 단골 주제가 "닌텐도에서 배우자"는 것이었다. 슈퍼마리오와 포켓몬의 세계 최대 게임회사의 성공 스토리 말이다. 게임 하나로 성공한, 문어발 대신 한 우물을 우직하게 판 경영이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닌텐도에서 배우자"는 강연은 머지않아 제목은 그대로인데, 내용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닌텐도 성공'이 아니라 '닌텐도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것이다. 아이폰이 등장하며 모바일 시대가 열렸는데 적시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콘솔과 게임기는 스마트폰으로 대체됐다.

이렇게 부침을 겪은 "닌텐도에서 배우자" 강연이 작년에 다시 부활했다. '포켓몬고'가 히트를 치면서 닌텐도 주가가 120%나 오른 것이다. 결국 타이밍을 잡은 기업은 살고, 놓친 기업은 사라졌다.

기업뿐이랴. 기업의 존망이 10년을 점칠 수 없는 시대에 개인에게 정년을 보장하는 직장은 없다. 일찍이 삼성에서 뛰쳐나온 이해진은 NHN을 만들어 돈방석에 앉았지만, 정년에 매달리던 숱한 월급쟁이들은 '사오정'이 돼 치킨집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이제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그렇다. 세 차례에 걸친 대국민 사과가 모두 한 발짝씩 늦었다. 처음에 제대로 사과했다면, 적시에 사퇴했다면, 탄핵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타이밍을 놓쳤다.

국가의 경우 더욱 그렇다. 특히 외교안보는 적시에 대처하지 못하면 회복하기 어려운 부담을 남긴다. ‘갑오왜란’과 ‘을미왜변’ 역시 자강(自彊)의 타이밍, 여기에 주변 열강과 적시 외교에 실패한 결과일 수 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위기도 적시에 불을 끄지 않으면 엄청난 후과(後果)를 초래할 수 있다.

바둑의 '신물경속((愼勿輕速)'은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두라는 뜻이다. 손자병법의 '병문졸속(兵聞拙速)'은 전쟁에서 군대 운용은 비록 서투르고 졸렬해도 빠른 것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타이밍이 어렵다. 옳았는지, 틀렸는지 세월이 지나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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