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생활보수, 생활진보

2017-09-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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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 = 이재호 초빙논설위원·동신대교수(정치학)]

생활보수, 생활진보

문재인 정권 사람들의 어휘구사나 조어(造語) 능력은 탁월하다. ‘대통령의 운전석론’만 해도 무릎을 치게 한다. 한반도문제에 주도권을 쥐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와대의 옹호도 비슷하다. 일각에서 그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아 후보 철회를 요구하자 민정수석실은 지난 1일 “생활보수여서 괜찮다”고 했다. ‘생활보수’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런 말이 있긴 했나.

청와대의 부연은 없었지만 앞뒤 맥락으로 미루어 이런 뜻 같다. 먹고살기 위해서 보수를 했는데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생계형 일시 보수’로, 굳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납득 못할 바도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절대적인 건 없다. 생활은 곧 밥벌이이고, 밥이다. 시인(詩人)은 이렇게 되뇐다.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한 그릇의 더운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장석주, 밥) 그런 밥 앞에서 잠시 보수를 했기로서니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 것이다. 정치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이념이 밥(생활)을 비켜간 건 다행인데, 그럼 생활보수의 ‘보수’는? 여기엔 보수란 원래 좋지 않은 것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보수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생활 때문에 했으니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 아닌가. 보수를 악(惡)으로 보는 인식은 낯설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도 생전에 “보수는 무슨 소리를 해도 보수일 뿐”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이해찬 의원은“보수를 궤멸시켜야 한다”고 했다. 어쩌다가 한국의 보수가 이런 말을 듣게 됐을까.

엄밀히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민주당도 보수정당이다. 한민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뿌리부터가 진성 보수이고, 반세기가 넘는 당의 역사와 이념, 정강정책도 보수다. 야당의 두 거목 김영삼, 김대중도 보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언론인 남시욱은 한국 보수의 기원을 조선조 말 개화파(開化派)에서 찾는다. 1830년대 이래 개화파들의 개화사상이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밑거름이 됐고, 1945년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탄생으로 이어지면서 보수의 원형질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에선 300∼400년 걸린 산업화와 민주화를 우리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50여년이란 짧은 기간에 달성한 것도 보수의 성취로 본다.

남시욱은 이런 보수가 부정부패, 권위주의 통치, 기득권에의 집착 등으로 정체(停滯)되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좌파에 밀리게 됐다고 진단한다. 지금이라도 보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기책임, 점진적 변화와 같은 보수 본연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남시욱, ‘한국 보수세력 연구’, 2005). 진보의 득세가 보수의 쇠퇴에 따른 반사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치열하게 성찰하고 투쟁하기로는 진보가 보수보다 윗길이다. 신념과 열정, 그리고 상상력에서 진보는 보수에 앞선다.

본격적인 보혁론(保革論)을 여기서 정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건 집권세력이 보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이처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좌우(左右) 대결의 골만 깊게 해 국정운영의 성공에 장애가 될 뿐이다. 입장을 바꿔 보수 측에서 진보를 가리켜 ‘생활진보’ 운운한다면 듣는 진보의 기분이 어떨까.
예컨대 한 저명 경제학교수는 방송에 나와 한국사회의 불평등에 관해 얘기하면서 청년들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볼 때는 분노하라”고 했다. 20, 30대 취준생들은 속이 다 후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 정권의 고위직에 기용되더니, 공개한 재산이 100억원에 가까웠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부유한 집안 출신의 수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울대 교수시절에 쓴 ‘진보집권플랜’(2010년)에서 “세상이 바뀌려면 생활에서도 좌파의 요구가 관철되어야 한다”고 했다(세계일보 2017년 9월3일). 청와대 입성 후 드러난 그의 재산이 49억원. 이 정권의 핵심 고위인사 십수 명은 자녀들을 모두 자사고와 특목고에 진학시키거나 유학 보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생활진보인가. 생활보수가 생활(밥) 때문에 보수에 잠시 의지했다면, 생활 진보는 생활 때문에 진보를 잠시 외면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고? 같은 생활이지만 전자는 ‘밥’이고, 후자는 ‘밥 너머’이고? 글쎄다. 분명한 건 그렇다고 후자를 위선적 진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너나 나나 자본주의 아래 살면서 단순히 재산의 과다로 사람들을 특정 범주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케네디가의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2009년 타계)는 가문, 권력, 부(富)를 모두 가진 미국 민주당의 대부였다. 하지만 상원의원 40년간 오직 진보정치의 대의(大義)를 위해 헌신했다. 사회복지 확대, 교육 재정 확충, 근로자의 처우 개선, 인종차별 종식 등 많은 영역에서 진보가 법제화되도록 노력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상원의원을 잃음으로써 역사의 중요한 한 장(章)이 막을 내렸다”고 애도했다.

한국의 진보세력에서도 이런 정치인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진보를 적대시하거나 질시하거나 희화화해선 안 되는 이유다. 보수가 진보를 대하는 자세는 이래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보도 보수에게 이 정도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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