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54] '차별 없는 종교'의 성과는? ②

2017-09-2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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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자신의 神을 앞세운 聖戰 대결

[사진 = 예배하러 가는 무슬림]

중세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의 서유럽과 이슬람세계가 각자 자신들의 신을 앞세워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맞부딪친 대표적인 종교 분쟁이다.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공격을 감행한쪽은 카톨릭의 서유럽이고 이를 방어하고 나선 쪽은 당시 셀주크투르크로 대표되는 이슬람 세계였다.
 

[사진 = 예배중인 무슬림]

11세기말 힘이 약해진 비잔틴의 황제가 셀주크투르크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교황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무려 2백년간에 걸친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을 불러왔다. 유럽이 성지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거나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의 광신적 살육 행위
어째든 1097년에 시작된 1차 십자군 원정은 2년 뒤 성지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함락시키게 된다. 여기서 십자군 병사들이 벌인 처참한 유혈극은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당시 이 지역에 어울려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여자와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학살당한 주민이 7만 여명으로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거주자의 절반이 살해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늘날의 유혈분쟁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서구 유럽에게 철저하게 파괴되고 인명이 살상되면서 피비린내를 풍겼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금 은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던 기독교 관련 성인들의 뼈나 유골 또는 귀중품 등 성유물(聖遺物,rekliquiae)을 얻기 위해 원정에 참가했던 십자군 병사들은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교회를 약탈하기도 했다.

▶ 잠자던 지하드 일깨운 십자군 원정
이러한 십자군의 광신도적인 살육행위와 만행은 당연히 이슬람교도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잠자고 있던 지하드 의식을 일깨웠다. 2백년에 걸친 긴 십자군 전쟁 과정을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아무튼 지하드를 선언한 이슬람은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한다.
 

[사진 = 은천 회족 사원의 예배]


그리고 여덟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성지회복이라는 명분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이 나게 된다. 십자군 원정이 세계사 흐름에 가져온 영향은 상당했다. 우선 교황권이 약화됐다. 그러면서 교회 개혁운동의 불이 붙었다. 봉건제도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동서교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전쟁의 영향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이교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무슬림들로 하여금 지하드의 신앙적 열기와 민족의식을 높이게 만들었고 타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용성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사진 = 실린복드 오보에 참배하는 몽골인]

그래서 유럽세계를 확실한 적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 십자군 정쟁이 빚어낸 가장 큰 부정적 결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 오늘날 중동의 서구에 대한 인식의 또 다른 출발점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 것이 오늘날 지구촌을 분쟁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단초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 對 이슬람 전쟁에서 종교의 자유 선포

[사진 = 칭기스칸 탄생 기념비]

칭기스칸의 이슬람 정복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 끝나지 않은 1220년대에 시작됐다. 칭기스칸의 이슬람 국가인 호레즘에 대한 공격이나 손자 훌레구에 의한 페르시아 지역 장악 그리고 손자 바투의 러시아 정벌 등 후계자들에 의한 전쟁이 상대방의 종교를 이단시하면서 종교적인 적대감을 앞세웠다면 아마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진 = 복드산(울란바토르) 오보참배]

"모든 종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며 어느 종교도 다른 종교에 대해 우위를 인정해서도 안 된다."

대자사크에서 언급한대로 칭기스칸은 호레즘과의 전쟁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 다른 신의 실체도 인정
물론 칭기스칸의 군대가 이슬람교도의 성서인 코란을 짓밟고 이슬람교도들을 살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것은 특정 종교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전쟁 상대자인 적에 대한 공격과 약탈의 과정에서 자행된 것일 뿐이었다. 칭기스칸의 이러한 종교정책은 마음을 열어 다른 나라의 종교를 그 실체로 인정했다.
 

[사진 = 이슬람 사원의 천정 벽화(사마르칸드)]

그때까지 몽골의 전통적인 종교는 샤먼을 매개로 하는 샤머니즘이었다. 텡그리 즉 하늘로 표현되는 샤머니즘에 대한 칭기스칸의 믿음은 그의 일생동안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슬람교와 불교, 네스토리우스교, 기독교 등 이민족의 다양한 종교와 접촉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믿는 神외에 또 다른 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진 = 몽골 여인의 참배]

칭기스칸은 비록 자신이 받드는 신이 아니지만 다른 신들의 분노를 사는 것은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종교 전쟁이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 종교전쟁의 화약고 피한 현명한 선택

[사진 = 도교 신자의 참배]

칭기스칸은 차별 없는 종교정책과 함께 모든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종교전쟁이라는 위험한 화약고를 피해 나가면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특히 이 정책은 이슬람지역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다. 만일 무하마드 샤의 아들 자랄 웃딘이 주도한 저항전쟁이 지하드, 즉 자신들의 종교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전개됐다면 칭기스칸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고전했을 것이다.

▶ 종교에 대한 열린 정책이 일궈낸 성과

[사진 = 장춘진인 금상]

그루지아에서는 몽골군이 기독교도라는 소문이 퍼져 빵과 소금을 든 주민들이 사제의 영도아래 몽골군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도교의 창시자인 장춘진인은 칭기스칸의 부름을 받고 늙은 몸을 이끌고 서역 땅 전쟁터까지 칭기스칸을 찾아가 만나서 생사와 관련된 가르침을 주었다.
 

[사진 = 도교의 본부 백운관(북경)]

그 덕분에 칭기스칸으로부터 도교의 발전을 지원 받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특정 종교집단이 제국내의 평화를 위협할 경우에는 이를 묵인하지 않고 가차 없이 탄압하거나 아예 존재를 말살시켰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특수한 경우이고 대부분 정복한 땅에서 칭기스칸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바로 칭기스칸의 열린 마음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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