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9-24 15:12
  • 글자크기 설정

차일혁, 정읍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는 또 다시 출동명령을 받았다. 고창작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1년 4월 10일이었다. 이번에 출동할 곳은 빨치산 세력이 득세(得勢)하고 있던 정읍(井邑)이었다. 정읍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빨치산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지난 3월 한 달 동안 산간부락을 기습한 것을 제외하고도 정읍을 24회에 걸쳐 매일같이 기습했다고 하니, 빨치산들의 만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빨치산들이 정읍에서 득세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동학의 발상지인 고부(高阜)를 인접하고 있는 정읍은 예로부터 한(恨)이 서린 곳이었다. 정읍은 6·25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야산대(野山隊)라 하여 빨치산들의 출몰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전쟁 초기에 미처 피난가지 못한 정읍경찰서장의 목을 잘라서 경찰서 출입문에 걸어 놓는 만행을 저지른 곳이 바로 정읍이었다. 국군이 진주할 때는 경찰서 유치장과 다른 건물들에 우익인사를 가둬놓은 채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400여명을 죽인 것도 바로 정읍이었다. 정읍은 그만큼 좌우 갈등이 심한 고장이었다.

 그렇지만 정읍은 전북에서도 으뜸가는 곡창지대이며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어쩌다 좌우대립이 심각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을 뿐이다. 전북도경에서는 빨치산들의 출몰로 황폐해진 정읍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자 드디어 차일혁 부대를 출동시키게 됐다. 차일혁 부대는 도청 앞에서 김의택 도경국장 겸 도경비사령관(道警備司令官)의 격려사와 각급 기관장 및 지방 유지들의 환송식, 정읍 출신 김택출 국회의원의 간곡한 격려사를 듣고 30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우렁찬 군가를 부르며 정읍으로 향했다. 창설 초기에는 1대도 없던 차량이 이제는 30대로 늘어났다. 새벽부터 들판에 나와 일하던 농부들이 출정하는 차일혁 부대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차일혁 부대는 신태인을 거쳐 정읍에 도착하자, 정읍여중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차일혁 부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읍경찰서 경무계장이 찾아왔다. 차일혁은 그에게 먼저 경찰서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경찰서에는 나중에 들르고 먼저 군청으로 가자고 했다. 군수실에 가보니 군수와 정읍경찰서장 그리고 이 고장 유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발대로 먼저 정읍에 온 김석원 부대대장은 선발대가 온 후에도 벌써 빨치산들이 3번이나 이곳을 기습했다고 보고했다. 김석원 부대대장은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자꾸 전영진 경무계장의 눈치를 봤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 보고하기가 난처하다는 눈치였다. 차일혁이 “왜 그러느냐?”고 다그치자, 그때서야 김석원 부대대장은 경무계장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이곳 정읍은 현재 경찰서가 있으나마나한 실정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차일혁은 이해가 되지 않아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김 부대대장은 “현재 다른 지방은 청년방위대(靑年防衛隊)가 거의 해산되었고, 설령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경찰의 지휘를 받고 있는데, 유독 이곳만은 청년방위대 밑에 경찰이 있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때서야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경무계장이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석원 부대대장의 보고는 사실이었다. 지난해 11월 경찰의 진주 후, 빨치산들은 하루를 멀다하고 읍내를 기습해 왔다. 경찰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또 비교적 몸을 사리는 경찰보다는 전쟁 이전부터 이곳에서 치안을 거의 도맡아온 청년방위대를 주민들이 신뢰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청년방위대가 주도권을 쥐고 경찰 업무까지 관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경무계장이 차일혁을 곧장 경찰서로 안내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청년방위대는 밤에 자기들끼리 암호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이를 모르면 경찰들도 예외 없이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암호를 몰라 잡힌 경찰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정읍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청년방위대가 정읍을 지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청년방위대를 손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차일혁이 청년방위대 간부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청년방위대 연대장은 차일혁이 전주 15청년방위단 총무처장으로 있을 때 알고 있던 자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후배들이었다. 차일혁은 청년방위대를 해체시켜 제18전투경찰대대의 작전지휘권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정읍군수와 경찰서장에게 이 뜻을 전하고, 청년방위대 대원들을 빠짐없이 차일혁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정읍여중으로 집결시키라고 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그런 후 차일혁은 대원들을 완전무장 시킨 다음 학교운동장 양편으로 정렬시켰다. 만에 하나 청년방위대 대원들이 말썽을 피우면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청년방위대의 연대장은 나타나지 않고, 부연대장이 중대장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차일혁은 청년방위대 간부들에게 “오늘부터 방위대도 차일혁 부대와 같이 작전을 해야 하는데, 왜 부하들은 데려오지 않고, 당신들만 왔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청년방위대 부연대장이 “우리들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권리가 없소.”라고 말했다. 차일혁이 “그동안 너희들이 애써 주민들을 보호한다고 해서 경찰이 너희들의 오만과 독선을 눈감아 왔으나, 이 차일혁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라고 일갈(一喝)했다.

 그리고서 청년방위대 간부들에게 경찰대대의 대열로 들어가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차일혁은 권총을 뽑아들고 그들의 발 앞에 총알 한 발을 쐈다. 그러면서 “셋을 셀 때까지 대열로 들어가지 않으면, 병신이 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고 소리치며 다시 총을 겨누자, 그때서야 그들은 슬그머니 경찰대대의 맨 뒤로 가서 섰다.

 차일혁은 특공대장에게 “당장 청년방위대 본부를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정읍경찰서가 골머리를 앓았던 청년방위대가 차일혁에 의해 제압됐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차일혁은 청년방위대의 중대장 3명에게 경사계급을 부여하고, 소대장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청년방위대 대원들은 차일혁 부대로 편입시켰다.

 차일혁이 정읍에 와서 보니 빨치산 세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차일혁 부대가 도착하기 열흘 전에는 경찰서 아래층까지 빨치산들이 습격할 정도였다. 게다가 청년방위대가 경찰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에 김진홍 정읍경찰서장은 제대로 빨치산을 토벌할 수 없었다. 차일혁은 군수와 지역 유지들에게 이곳 정읍은 워낙 광대한 지역이므로 빈약한 인원과 장비로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민들의 협조가 필수라고 역설했다. 특히 유지들에게는 주민들의 민심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언행에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차일혁은 정읍서장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정찰대를 내보냈다. 정찰대가 하루 종일 김 서장의 정보대로 주변지역을 수색했지만 빨치산들의 거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차일혁이 청년방위대 대원들을 불러 적의 거점을 확인한 결과, 정읍서장과는 전혀 달랐다. 알고 보니 부임한 지 갓 한 달밖에 안 된 경찰서장은 정읍의 지리에 밝지 못해 빨치산들의 동태와 거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격전은 험한 산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규전과는 달리 공격하는 쪽이 먼저 피해를 당하게 마련이다. 적들은 높은데서 미리 공격을 탐지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기습전을 감행한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그들은 감쪽같이 달아나 버리므로 아군만 힘을 빼게 된다. 유격전에 토끼몰이식의 작전이란 통하지 않는다.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에서는 그들이 대규모로 정면 공격을 했기에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었으나, 정읍에서의 빨치산 토벌은 숨바꼭질이나 다름없었다.

 차일혁 부대의 가장 큰 임무는 국군8사단에 앞서 작전을 개시하여 국군8사단의 작전지역인 순창과 담양의 경계지역인 가마골로 빨치산들을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일혁은 토끼몰이식 작전에 만족할 수 없어 직접 그들과 한판 겨루어 볼 심산(心算)이었다. 정읍 주변의 모든 산들을 수색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그래서 차일혁은 내장산, 입암산, 백양산을 중점적으로 수색하면서 빨치산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작전은 다소 무모하지만 빨치산의 허점을 찌르기로 했다.

 4월 12일 새로 편입된 대원들과 차일혁 부대의 기존대원들을 합쳐 다시 편성을 한 후, 거기에 맞는 훈련을 실시했다. 4월 13일 저녁, 차일혁은 이틀 후 실시할 야간기습작전을 위해 내장산(內藏山) 골짜기로 잠입했다. 내장사(內藏寺)를 비롯한 근처의 절들은 수시로 빨치산들이 들락거리며 휴양소 겸 대기소로 이용하곤 했다. 절터에 대한 남다른 경외심을 품고 있던 차일혁은 내장사 절터만은 반드시 빨치산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4월 14일, 꽃들이 만개해 오는 4월이었지만, 이곳 내장산 골짜기에는 아직도 찬이슬이 새벽공기를 흐리고 있었다. 어둠에 뒤섞인 뿌연 안개 속에서 제18전투경찰대대 정찰대원들은 밤잠도 잊은 채 경계태세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지봉 기슭에 올라선 차일혁은 계속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둥그런 초가집 무더기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내장산 자락에서 시작된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때 엄폐물 뒤에 몸을 가리고 망원경으로 마을 쪽을 지켜보던 최순경이 뭔가 미심쩍은 듯 몸을 세웠다. “대장님, 저 지붕들을 보십시오.” 망원경을 건네받은 차일혁은 말없이 전방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수십 채의 초가지붕 위에는 간간이 두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밤낮으로 태극기와 인공기를 교대로 내어다는 생활이, 이제는 이곳 산간마을의 오랜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그곳을 지켜보던 차일혁의 마음은 착잡했다. 차일혁 부대가 이곳 내장산으로 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이곳 정읍은 벌써 몇 차례나 제18전투경찰대대의 토벌작전으로 수복된 곳이었으나, 대대가 이동하고 나면 또 다시 빨치산들이 활동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작전은 좀 색다른 것이었다. 밤낮 없이 출몰하는 빨치산들로 인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정읍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에서는, 내장산 일대를 근거지로 해서 암약하고 있는 빨치산들을 송두리째 뽑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야만 남한 일대에서 준동하고 있는 빨치산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군경 합동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이번 작전에서 차일혁의 18전투경찰대대는 내장산·입암산·쌍치골 등의 빨치산을 추격하여 새로 삼남지구전투사령부(三南地區戰鬪司令部)가 된 국군8사단의 작전지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작전지도를 힘차게 펼쳐보였다. 4월 15일 새벽1시, 드디어 작전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 올랐다. 지난 칠보발전소 탈환 이후, 군경의 동계(冬季) 토벌작전으로 밀려났던 빨치산들이 내장사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빨치산의 총인원을 알 수 없었다.

 내장사에는 여승 30여 명이 있었다. 주지승은 여승들을 구해달라고 했다. 차일혁은 작전을 통합 지휘했다. 지형에 밝은 정읍경찰서 대원들을 각 소대에 배속시켜 작전을 개시하게 하고, 제17전투경찰대대와 정읍경찰서 병력은 정면에서 공격하게 하고, 차일혁은 18전투경찰대대를 지휘하여 적의 예상 후퇴지점을 막고, 후미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 후 차일혁은 “1중대는 내장사로, 2중대는 신선봉 방향으로, 3중대는 태암봉 방면에서 양쪽을 엄호하며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서 차일혁은 1중대장 우희갑(禹熙甲) 경위를 따로 불러 “길을 피해 계곡을 따라 절로 접근해라. 2인 1조로하여 최소한 10미터의 간격을 두고 올라가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절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놈들을 밖으로 유인해서 사살하라. 특히 스님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차일혁의 작전지시가 끝났다. 1중대의 기습조가 내장사를 향해 진격했다. 풀숲을 헤치는 소리와 수통이 덜컹대는 소리에 섞여 가쁜 숨소리가 산악의 새벽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잠시 후 사격개시를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온 산이 총성과 포성으로 뒤덮였고 여기저기 불꽃과 조명탄의 섬광이 튀어 올랐다. 야간기습공격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무모한 작전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오히려 기습을 당한 빨치산들이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빨치산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1중대장이 놈들의 퇴로를 차단해 달라고 했다. 2중대와 3중대가 추격전을 벌였다. 차일혁은 너무 깊숙이 쫓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적들을 추격하던 2중대와 3중대의 귀환을 기다리던 차일혁이 망원경을 떨어뜨리며 얼굴표정이 굳어졌다. 내장사가 있는 계곡에서 난데없는 불길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절이 타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대원들 틈에 섞여 있던 내장사 주지가 산마루로 뛰어올라서며 소리쳤다. 차일혁은 급히 본부중대를 이끌고 내장사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거센 불길이 이글거리며 하늘로 높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 아래로는 벌겋게 달아오른 나무토막들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서서히 군홧발을 떼며 경내에 들어선 차일혁 앞으로 1중대장이 뛰어들었다. “대장님, 보고 드립니다. 적 사살 21명, 무전기 한 대, M1 소총 및 기관총 1정을 노획했습니다.” 헉헉거리며 보고하는 1중대장에게 차일혁은 반응을 보이지 없었다. 차일혁의 시선은 점점 기승을 부르며 타오르고 있는 불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차일혁의 무응답을 알아차린 1중대장 우희갑 경위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일혁이 노기(怒氣) 띤 목소리로 “내 말을 못 들었나. 누가 절을 태우라고 했나?”라며 질책했다. 1중대장은 “대웅전에서 놈들이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겁을 주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됐습니다.”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차선책을 강구했어야지. 함부로 고찰(古刹)에 불을 지르면 어쩐단 말인가. 절을 태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작전을 꾀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라며 차일혁은 아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먼 허공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그날의 전과는 눈부셨다. 적 사살 21명에 카빈 2정, M1 소총 한 정, 백미 4가마를 획득했다. 그에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부상 7명이었다. 야간기습작전에서 이만한 전과를 거뒀다는 것은 대성공이었다. 열악한 전투경찰대의 장비로 적의 기포병단의 기관단총에 맞서 야간전투를 결행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그리고 전과에는 3명의 투항이 있었다. 새벽녘 불출암에서 생포된 세 명의 여자 빨치산들이었다.

 긴장과 침묵이 남아 있는 암자 앞 공터를 나서면서 차일혁은 “본부중대장, 이 세 사람은 귀순으로 처리한다. 내장사 공격 시 끝까지 저항하던 나머지 공비들은 도주했지만, 이 세 사람은 대열을 빠져나와 우리에게 투항했다, 알았나?”라며 소리쳤다. 눈이 휘둥그레진 본부중대장은 무언가 입을 떼려다 말고, “네, 알겠습니다.”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대원들이 다시 집결한 내장사 절터에 새벽어스름이 가시고, 눈부시게 환한 아침햇살이 뜨락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대원들의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한 군가처럼 울려 퍼졌다. 이곳에서 점검을 마친 직후 곧바로 아침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급히 끓인 우거지 된장국에 밥 한 덩어리가 담긴 반합에 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늦은 식사였지만, 꿀맛이었다. 차일혁은 타다만 절의 돌 위에 앉아 대원들과 함께 똑같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차일혁 부대는 내장산 소탕전을 끝마치고, 다음 작전을 위해 이동했다. 차일혁은 정읍경찰서 특공대과 함께 입암지서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입암산의 빨치산들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사살 3명, 칼빈 3정, 실탄 80발을 획득하고, 양민 11명을 구출했다.

 4월 16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적을 계속 추격했다. 17대대로부터 전날의 전과(戰果) 보고가 있었다. 사살 37명, 생포 28명, M1소총 1정, 아식 장총 13정, 따발총 2정, 실탄 540발이었다. 입암산을 벗어나 백양산으로 도주하는 빨치산을 향해 중화기로 지원사격을 했다. 포연(砲煙)과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고 대원들이 추격전을 벌였다. 빨치산들이 도주하는 전방에 포탄이 명중하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날도 많은 전과를 올렸다. 사살 24명, 칼빈 1정, M1소총 1정, 벼 4가마를 획득했다. 빨치산들은 소위 카추샤 병단(兵團)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었다.

 4월 17일, 차일혁은 빨치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전남 도계(道界)를 넘어 계속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병선 작전참모는 작전 구역을 넘어 작전할 때는 상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차일혁은 상부의 문책이 있으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오히려 부하들을 독려(督勵)하고 나섰다. 빨치산들은 차일혁 부대가 도(道)의 경계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차일혁은 빨치산들의 그런 수법을 간파하고, 신속히 도(道)의 경계를 넘어 추격했던 것이다. 차일혁의 기습적인 추격에 빨치산들은 격멸됐다. 문책을 감수한 차일혁의 용단(勇斷)으로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차일혁 부대는 사흘 동안의 작전을 통해 사살 190명, 생포 62명, 총기 128정, 실탄 1,444발. 백미 216가마, 일본도 2개를 획득했다. 그리고 적 아지트 570개소를 파괴하고, 도로 7개소와 교량 8개소를 복구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하지만 상부의 승인 없이 도계를 넘어 작전한 것이 결국 터졌다. 전남도경의 거센 항의에 전북 도경국장이 곤혹을 치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전북 도경국장은 차일혁에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일혁을 따뜻하게 감싸줬다.

 차일혁도 전투를 끝내고 간만에 휴식을 취했다. 차일혁 부대의 작전성공으로 오랜만에 평화를 찾은 마을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마을 곳곳을 돌았다. 차일혁도 절로 흥이나 장구를 받아 어깨에 둘러메고 장단을 맞추며 주민들과 어울렸다. 총을 맞은 왼손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으나, 흥겨운 가락에 몸을 싣고 한참동안 동네를 함께 돌았다. 피땀 흘리면서 전투하는 것이 바로 이를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작전 중 노획한 백미(白米)는 모두 이재민(罹災民)들에게 나눠 주고, 주인을 찾지 못한 소 한 마리는 차일혁 부대가 진주하던 날, 소를 잃어버렸다는 농부에게 건네줬다. 정읍에는 소가 부족해 사람이 농우(農牛) 대신 쟁기를 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던 차일혁이 소를 잃은 주민에게 줬으니, 그 농부가 얼마나 기뻐했는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것이다.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 용맹스러웠지만, 토벌을 마치고 마을에 내려와서는 그 누구보다 주민들을 위하고 주민들을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차일혁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끝없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주민들에게는 한 없이 따뜻하고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애민경찰(愛民警察)이었다. 빨치산들에게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해왔던 정읍도 차일혁 부대의 선전(善戰)으로 진정한 평화를 되찾게 됐다.〈끝〉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