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2] 무엇이 모스크바를 성장시켰나? ①

2017-10-1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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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과녁판 같은 모스크바 중심가

[사진 = 모스크바 중심, 고리끼 거리]

모스크바의 중심부는 크렘린과 붉은 광장을 중앙에 두고 세 개의 환상(環狀)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또한 중앙에서 외곽으로 방사선형으로 도로가 뻗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모스크바 중심부는 마치 과녁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의 재건이 가장 먼저 시작됐던 고리끼 거리는 붉은 광장에서 환상도로를 가로지르며 북서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도로다.

과거 짜르(황제)의 사자가 말을 타고 다니고 우편 마차가 지나갔다고 하는 이 거리는 현재 모스크바의 번화가 가운데 하나로 변모해 있다. 길 양편으로는 호텔과 상가, 박물관 그리고 정부 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모스크바 시청도 이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창설자 돌고루키

[사진 = 유리 돌고루키 동상]

시청 맞은편에는 과거 소비에트 광장이라고 불리던 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는 앞발을 약간 들어 올리고 말 위에 올라앉아 모스크바를 지켜보고 있는 기사(騎士)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모스크바를 지키고 서 있는 이동상의 주인공은 유리 돌고루키(Юрий Долгорукий)다. 바로 1147년 모스크바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모스크바市는 지난 1947년 市 건설 8백주년을 맞아 세 명의 이름 있는 조각가에게 의뢰해 지금의 동상을 광장에 세웠다.

▶영지에서 대규모 연회 연 것이 기원

[사진 = 모스크바 강(18세기)]

돌고루키는 당시 블라디미르 수즈달리 공국의 왕자였다. 이름자체를 그대로 해석하면 ‘긴 팔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상당히 장대한 신체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블라디미르와 수즈달리는 앞서 황금의 고리 도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스크바 동북쪽에 자리한 도시로 당시에는 강력한 루시의 공국이었다.
이에 비해 모스크바는 울창하게 우거진 검은 숲이 들어서 있었던 돌고루키의 영지로 소수의 농민들만 살고 있던 곳이었다. 돌고루키는 모스크바 강변에 있는 숲이 아름답게 우거진 이 산림지대에 다차(Дача), 즉 별장형태의 집을 지어 놓고 때때로 이곳에서 머물렀다.

1147년 4월 4일 돌고루키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초대해 놓고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 초대된 사람은 자신의 형을 비롯한 친지들과 노보고르드 공국의 유명 인사들이었던 것으로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대 연회를 열었던 이날은 바로 모스크바가 탄생한 날이 됐다.

▶목책 성 크렘린 탄생

[사진 = 크렘닌 성곽]

이후 1156년, 돌고루키는 모스크바 강이 지나가는 이 강변에 나무로 방책을 두르고 해자를 파서 요새를 만들었다. 바로 크렘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2백여 년 뒤 모스크바의 대공 드미트리 돈스키가 그 자리에 돌 벽으로 된 성을 건설한 것을 현재 이미지의 크렘린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상 크렘린의 역사는 이때부터라고 봐야할 것이다.
 

[사진 = 크렘닌 내부도]

[사진 = 크렘닌 궁전 내부모습 ]

[사진 = 크렘닌 내부 St. George 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분법 체계 속에서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크렘린은 안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강력한 방어벽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무언가 음흉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말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크렘린은 나무로 둘러쳐진 울타리와 같은 성채와 내성을 가리키는 말로 그다지 강력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말은 아니었다. 크렘린의 건설과 함께 모스크바는 블라디미르 수즈달리 공국의 변방 마을로 등장하게 된다.

▶강 이름 딴 모스크바
마을의 이름은 크렘린 옆을 지나는 모스크바 강의 이름을 따서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그 강은 지금도 크렘린 남쪽을 뱀처럼 휘감으며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마을을 만들기는 했지만 모스크바는 여전히 작은 변방에 불과했다. 도시라고 이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던 모스크바는 아마 몽골의 러시아 지배가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진 = 러시아정교 사원]

설령 지리적인 이점이나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을 했다 하더라도 줄곧 러시아 역사의 중심지가 되고 지금처럼 세계적인 도시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타타르 멍에’가 성장시킨 도시

[사진 = 바실리 성당]

바투의 몽골 원정군이 러시아 공국들을 장악할 때 모스크바는 지나는 길목에 놓인 마을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당시 몽골군으로서도 전혀 정벌을 고려하지 않았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킵차크한국이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모스크바의 성장은 눈부셨다. 작은 마을이 다른 공국들과 어깨를 겨루는 공국으로 성장하는 데 불과 20여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공국들을 사실상 거느리는 대공국으로 변신하게 된다.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적어도 모스크바에게는 몽골의 지배가 그들에게 멍에를 씌운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그러한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이 몽골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협조하고 그에 대한 보답의 열매를 챙겼기 때문이었다. 킵차크한국의 지배아래 러시아의 공국들은 독립성을 잃어버린 채 바투와 몽골의 대칸에게 복종했다.

[사진 = 크렘닌 내 Beil Tower(크렘닌 내 최고 높이)]

바투는 공후들 가운데 한명을 대공으로 임명했다. 누구를 대공으로 임명하느냐하는 것은 전적으로 킵차크한국에 얼마나 충성하고 복종하느냐가 그 바로미터가 됐다. 그러한 절차를 거쳐 대공에 임명된 사람이 블라디미르 수즈달리 공국의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다. 스웨덴과의 네바강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몽골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공국 안에서 일어나는 反몽골 활동을 탄압했다.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몽골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타타르의 멍에를 스스로 불러들인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평가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교묘한 현실적 정책으로 러시아 민족을 몽골의 파괴로부터 구한 인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몽골의 지원으로 급성장한 모스크바

[사진 = 모스크바강]

알렉산드르 네브스키가 몽골에 조공을 바치고 약탈과 살육을 피하는 외교술을 발휘하면서 그 아래에서 가장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는 곳이 바로 모스크바였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의 아들인 다니엘 알렉산드로비치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가 이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마을의 건물들이 늘어나고 모스크바강의 수운을 이용한 교역도 활발해져 모스크바는 점차 상업도시로 변모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아버지 네브스키가 킵차크한국에 협조하면서 얻은 혜택의 상당 부분이 아들이 머물고 있는 모스크바에 돌려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성에 불과하던 모스크바는 몽골지배 20여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모스크바는 1263년에는 드디어 하나의 공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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