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6] 明나라는 어둠의 제국인가? ②

2018-01-17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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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反몽골․한족 위업 승계 선언

[사진 = 주원장 초상화]

몽골을 초원을 밀어낸 뒤 주원장은 몽골이 대륙에 남겨 놓은 것을 걷어 내는 작업을 통치의 우선적인 과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한나라와 당나라의 위업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한족(漢族)의 나라를 추구하겠다는 분명한 뜻을 밝힌 것이다. 옷에서부터 식생활과 풍습, 언어에 이르기까지 몽골의 잔재를 걷어내는 작업에 열심이었다.
 

[사진 = 적수담로]

그러기 위해서는 전(前)시대를 부정하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에 몽골의 유산을 철저하게 깎아 내렸다. 몽골이 몽골지상주의를 내걸고 한족을 멸시하고 한족의 문화를 짓밟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농경생활에 경험이 없는 유목민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농민들을 피폐화시켰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사진 = 명나라 궁정도]

몽골의 황실이 권력투쟁을 일삼으면서 밀교인 라마교에 심취해 궁중에서 음란한 행위를 일삼으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중국의 사료에서 몽골제국의 후반 치세가 실제보다 훨씬 더 악랄하게 묘사된 것은 다분히 몽골을 치세를 부패와 암흑의 시대로 몰아붙이기 위해 조작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 반동정치(反動政治)의 시대
이 같은 기치를 내걸고 反몽골적인 것을 추구했지만 백여 년 이상 대륙을 지배한 몽골이 남겨 놓은 것을 완전히 걷어낸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우선 몽골제국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그대로 남아 명나라로 흡수됐다. 그들이 몽골인만이 아니고 위구르인이나 거란인, 무슬림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몽골이 남겨 놓은 유산이었다.
 

[사진 = 명나라 군대 도열]

주원장이 아무리 공포정치를 펼쳤다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완전한 인적 청산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몽골의 것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것이 많았다. 천호제의 유산을 받아들인 군대편제를 비롯해 의식주에서 남겨진 몽골의 것들이 그 것이다. 실제는 그렇지만 초기의 명 제국은 그 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몽골의 것에 반대되는 행보를 취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문제는 몽골의 것들 속에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많은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는데 있었다. 그 것에 反해서 가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반동 정치가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 문화의 암흑기

[사진 = 자금성]

명나라 초기는 문화의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다. 글자 한자 잘못 사용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살벌한 상황에서 누가 글을 쓰려고 나설 수 있었겠는가? 그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누가 학문을 논하고 시화(詩畵)를 즐길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주원장은 유능한 인물, 학자, 지식인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무려 100년 이상 동안 이렇다 할 학자나 문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몽골제국 후반기에 학문 활동이 자유스럽고 활발하게 진행된 것과 비교하면 이 분야는 완전히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 정지된 통상․상업 활동

[사진 = 지원통행보초(元 화폐)]

더욱 애석한 것은 통상과 상업 활동이 거의 정지 상태에 들어간 점이다. 몽골이 애써 닦고 가꾸어 놓은 경제 운용 시스템이 무너지고 뒷걸음질 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은과 염인 그리고 지폐를 바탕으로 하는 통화제도 역시 무너져 버렸다. 육지와 바다를 관통하는 국제적인 통상도 정지 상태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바닷길이 막혀 버리면서 명나라는 거의 쇄국(鎖國)상태에 들어갔다.

팍스 몽골리카시대 때 절정에 이르렀던 동서교역은 단절되고 중국대륙은 한정된 울타리 안에서 가진 것만 교환하고 사는 자연경제 상태로 되돌아갔다. 바닷길이 막힌 것은 더 이상의 해상진출이나 해양발전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은 주원장의 아들로서 조카를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영락제(永樂帝)때를 제외하고는 명 제국 내내 이어졌다.

▶ 해금(海禁)으로 막힌 바닷길

[사진 = 영락제]

영락제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정화함대의 대항해’는 해양 역사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의미 있는 것으로 바스코 다 가마에 앞서 희망봉을 발견하고 마젤란보다 먼저 세계 일주를 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환관 출신의 정화제독은 1405년부터 28년에 걸친 7차례의 항해를 통해 주원장에 의해 막혔던 바닷길을 다시 열면서 ‘정크교역권’의 부활을 시도했었다.
 

[사진 = 정화함대 항해로]

정화함대의 대 항해는 영락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것도 이때뿐이었다. 이후 명나라는 해금(海禁)이라는 이름으로 막았다. 대형 선박의 건조도 금지되면서 몽골제국시대 활발했던 해양에 관한 지식과 기술은 사장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몽골시대 바닷길을 주름 잡았던 무슬림들을 그대로 인계 받았지만 그들의 해양 지식과 교역의 노하우는 무용지물이 됐다.

자연히 밀무역이 생겨나면서 해적과 왜구의 출현을 불러오게 된다. 이처럼 명나라는 몽골제국이 애써 싹을 틔어 놓은 시대를 앞서가던 모든 제도와 실적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 서유럽 세계정복 기회 제공

[사진 = 가욕관성]

유라시아 대교역권도 무너져 버리고 역사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동과 서의 힘의 역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서유럽이 주도권을 쥔 세계사가 이루어진다. 몽골제국이 문을 열어 놓은 바다로의 시대는 정지 상태로 들어선 것이다. 반면에 몽골시대 동방에서 넘어간 나침반 등 해양술과 화약 등을 받아들인 서유럽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양의 시대를 열었다.

명나라가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15세기와 16세기에 유럽은 육지로, 바다로 활로를 넓혀가면서 ‘해양의 시대’, ‘화포의 시대’를 다져나갔다. 몽골시대까지 유지되던 동방의 우세는 어느 새인가 역전된 것은 물론 서방은 저만큼 앞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것은 결국 서유럽이 세계 정복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된 대부분의 책임은 명나라에게 있지만 그 영향은 그들 시대에만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것이 결국 현재의 세계구도를 만들어낸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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