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 ‘관습’이란 단어 뒤에 숨은 권력자의 ‘횡포’

2018-02-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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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주경제DB]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진행된 관습적으로 일어난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나쁜 죄인지도 모르고 저질렀을 수도 있고, 더러운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한 집단 내에서 군림하던 권력자는 ‘관습’이란 단어 하나로 자신의 죄를 해명하고 회피했다.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란 피켓을 들고 피해자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던 후배 동료 연극인들의 외침 역시 허망하고 덧없게 묻히고 말았다.

연극 연출가로 알려져 있는 이윤택은 과거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8년 나온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가 그것인데, 영화는 치한 두 명으로부터 성추행 당한 여성이 혀를 물어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당시 피해자는 1심에서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지만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재판장에게 “만일 또 다시 이런 사건이 제게 닥친다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시대에 처한 여성 인권의 열악함과 법의 구조적 모순을 힐난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피해자로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란 영화의 도입부다. 극본을 쓴 이윤택은 현재 성추행과 성폭행 의혹으로 연극계는 물론 국민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니 역사는 때론 그렇게 역설적으로 흘러 가기도 하는가 보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폭로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지만, 원인을 이윤택 개인의 문제로 국한해서 다뤄선 안 된다. 극단 내에선 절대자로 추앙 받는 예술 감독과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서는 것이 목표인 배우들의 관계는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갑을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이윤택의 기자회견 당시 현장에서 만난 다른 극단의 관계자는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지금껏 나온 피해자들과 비슷한 피해를 당한 연극인들이 많다. 공공연한 비밀일 뿐 이윤택처럼 성적 학대를 일삼는 선배 연극인들도 비일비재 하다”고 연극계 전체가 직면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관습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그 사회 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이다.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단순히 관습으로 인지했다면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권력을 무기로 저지른 횡포는 관습이란 단어 뒤에 숨기엔 무자비하고, 피해자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심하다.

 

[사진=문화부 정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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