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⑭]작고한 남자현손자, 김시련 마지막 인터뷰

2018-03-0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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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스토리, 교과서 실린다더니 쑥 들어갔어요”

친손자 김시련(1923년생) : 2010년 8월 2일,김시련옹 자택서. 인터뷰어 이상국
 

[사진 - 2010년 인터뷰를 끝내고 기념 촬영을 했다. 남자현 손자 김시련 옹(오른쪽)과 필자.]



 40년 교직생활 뒤 쓸쓸한 말년...훈장연금으로 생활
“할머니가 아직도 절 먹여살리는 셈”

그토록 담대하게 독립운동가들을 이끌고, 그토록 망설임 없이 무장투쟁에 나섰던 투사 남자현이지만 친손자 김시련 앞에서는 더없이 따뜻한 할머니였다. 임종 때도 이 손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죽음마저 미루고 있었다. 부랴부랴 달려온 11세 손자를 바라보고는 “이제 됐다”는 말을 나직이 뱉었다.

간직하던 행낭을 풀며 49원80전을 손자 공부시키는 데 쓰라고 당부했다. 혈육에 대한 애착은 보편적인 모성 그 이상의 것이다. 젊은 시절 3대 독자였던 남편을 여의었을 때 그녀는 배가 부른 몸으로 상(喪)을 치렀다. 유복자인 4대 독자 김성삼은 그녀에겐 삶의 이유였고, 삶의 무게이기도 했다. 만주로 건너간 뒤 남자현은 경북 영양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고 있을 아들을 급히 불러 올렸다. 그에게 공부를 시키는 게 급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성삼이 낳은, 당시로서는 유일한 손자가 김시련이었다.

남자현의 후손에 대한 인터뷰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후손들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4대까지 독자로 이어진 집안이었고, 손자는 만주에서 태어났기에 친척을 찾는 일이 묘연했다. 지금까지 나온 기사들과 영양군 문화원에서 발간한 <영양의 독립운동사>(2006)에 나온 기록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단편적인 자료로는 손자 김시련 씨와 그의 배다른 동생 김시복(국가보훈처 차관 경력) 씨가 있다는 사실 정도까지만 알 수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기록이라 이들의 생존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순국선열유족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김시련 씨가 이사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족회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옆에 있다고 했다.(현재는 마포구 합정동 독립유공자복지회관 4층에 있다) 인터넷에 적힌 전화로 통화를 해보니 없는 번호라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거기에 적힌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현저동으로 사무실을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답신이 왔고, 거기에는 손자 김시련 씨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침인지라 너무 이른 전화가 되지 않도록 기다렸다가 번호를 눌렀다. 이렇게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택시를 타고 미아삼거리 부근의 자택으로 가는 중에 굵은 비가 창을 때렸다. 부근에서 전화를 하니, 집에 손님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인터뷰 장소를 호텔 커피숍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물었다. “댁에 있는 앨범도 보면서 편히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손님에게 방해가 된다면 한 귀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게 해주셔도 괜찮은데요.” 그렇게 고집을 부린 것은, 무엇보다 남자현 선생의 후손이 살아가는 현장 모습을 생생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성당 옆 중국집을 돌아선 골목길에서 두 번째 집. 철제 대문이 있는 낡은 양옥집 앞에 ‘김시련’이란 문패를 보고 가슴이 뛰어 비를 맞고 있는 것도 잠깐 잊었다.

아주 반듯해 보이는 인상의 노인. 김시련 씨는 말이 조금 느리고 귀가 약간 어두운 듯 했지만 비교적 정정했다. 소파에 앉자 훨씬 발랄해 보이는 부인 이영자 씨가 주스 세 잔(사진기자도 동석)을 내왔다. 우선 가장 궁금했던 것이 남자현 선생 후손의 근황인지라 그것부터 파악했다. 호구 조사처럼 딱딱한 질문이 됐다.

- 형제분은 어떻게 되십니까?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김시복은 서울 서초동에 살고 있고, 김시윤은 일산에 거주합니다.”

- 선생님(손자 김시련)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40년 동안 교직에 있었지요. 마지막으로 있었던 것이 안동 길원여고 교장이었는데 1978년부터 1989년까지 11년 있었습니다.”

- 이곳(성북구 하월곡동)엔 언제 오셨습니까?
“1978년입니다. 제가 지어서 들어온 집입니다.”

- 만주에서 태어나셨지요? 국내에는 언제……?
“예, 만주에 있는 교하에서 태어났고 하얼빈에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졸업했지요. 광복되면서 서울로 왔습니다.”

- 지금 연세가?
“우리 나이로 88세(2010년 당시)입니다. 1923년생이죠.”

- 할머니(남자현) 임종이 1933년이었죠?
“예. 저는 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죠. 나이는 11살이었고.”

-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좀…….
“아버님(김성삼)은 1978년에 돌아가셨어요. 군인이셨는데 중령으로 예편하셨지요. 그리고 저의 생모는 김갑생이었고, 아주 일찍 돌아가셨어요. 새로 어머니(장덕신)께서 들어오셔서 아들 셋(첫째 아들은 월남전 후유증으로 돌아갔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1988년 작고하셨지요.”

이번에는 자식들에 대해 질문했다. 김시련 씨에겐 아들이 셋 있었다. 맏아들 김종식(53) 씨는 옌볜과기대 교수이고, 둘째 김준식(52) 씨는 인천에서 학원강사를 하고 있으며, 셋째 김광식 씨는 삼성에 다니고 있었다. 이날 김시련 씨 댁을 찾아온 손님은 방학을 맞아 할아버지 댁을 찾은 손자 김일환·김정환 군이었다. 김종식 씨의 두 아들로 나란히 연세대에 다니고 있었다.

호구 조사는 대강 그런 정도로 끝났는데, 흥미로운 얘기가 하나 나왔다. 할머니 남자현에게 언니가 한 분 계셨는데 그 자손이 현재 영양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대단한 부잣집인 조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남자현의 언니가 낳은 아들이 조범석 씨이다. 조범석 씨는 경북지방 대지주로 가끔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범석 씨의 아들 조운해 씨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을 지낸 분으로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맏딸 이인희 씨와 결혼한 사람이다. 즉 남자현의 언니는 삼성 ‘왕회장’ 맏딸의 시할머니인 셈이다. 무장투쟁을 한 열혈독립운동가와 삼성가가 이렇게 엮이기도 한다.

- 할머니(남자현)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요?
“사실 저는 할머니를 보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우리는 만주 교하에 살았고 할머니는 늘 밖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아주 가끔 오셨는데 잠깐 머무르다가는 가셨습니다.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기억은 없었죠. 이런 얘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일본군에 쫓기던 시절, 급히 피신해야 하는 상황인데 장총을 버리지 못해 일곱 정을 어깨에 메고 뛰었다고 하더군요. 일부 과장된 얘기일 수 있겠지만, 할머니는 정말 활달하고 대담하셨던 것 같습니다.”

- 임종 때는 어땠습니까?
“그때 아버지와 교하에 있었는데,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버지가 짐을 챙겨 나가실 때 저도 같이 가겠다고 졸랐어요. 하얼빈의 고려여관이란 곳에 갔어요. 할머니는 저를 보고 잠깐 반가운 표정을 지으셨지요. 그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죽고 사는 것이 먹고 안 먹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지금도 곰곰이 생각합니다. 저녁 무렵에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곤히 잘 테니까 깨우지 마라.’ 그런데 곁에 있던 아버지가 보니 숨소리가 이상했던가 봐요. 그래서 흔들어 깨웠더니 할머니는 ‘깨우지 말라는데 왜 깨우냐’ 하면서 다시 눈을 감으셨지요. 또 걱정이 되어서 아버지가 깨웠더니 ‘허어, 깨우지 말랬지 않느냐’ 하고는 눈을 감으셨어요. 그 뒤에 의사를 불렀는데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무시는 듯 계시다가 이튿날 정오 무렵에 영면하셨지요. 마치 돌아가실 일을 아시는 듯했습니다.”

- 유언할 때 손자(김시련) 말고 친정의 증손을 챙기셨는데, 그분은 누군가요?
“남씨 집안의 남재각 씨입니다. 저와는 동갑(88세)이지요. 친정에도 보살필 손이 없어 외롭게 홀로 있던 아이였지요. 실제로 그 유언대로 아버지는 영양에 있던 남재각을 데려와 초등학교 5학년까지 공부를 시켰습니다. 용정에 있던 남재각의 부친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와 국내에서 상주와 예천의 초등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 만주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아버지는 처음에 여관을 경영하시다가 나중에 잡화점을 차렸어요. 만주에서는 이런 가게를 차린다면 살림이 여유롭다는 뜻이에요. 제가 하얼빈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지요.”

- 교직 생활을 40년 하셨는데 연금을 받지 않는지요?
“나는 공무원 연금제를 잘 몰라서 그것을 일시급으로 탔지요. 그래서 연금이 없습니다. 공무원 시절에 자식들 공부는 다 시켜놨고 특별히 잘살려고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기에……. 별로 부족한 건 없습니다. 아내와 저, 이렇게 두 식구가 내 집에서 사는 데는 괜찮습니다. 사실 할머니에게서 나오는 연금이 아니라면 생활이 곤란했을 겁니다. 사실 나는 돈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가끔 아내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라도 사는 게 다 할머니 덕이다라고요.”

- 할머니의 독립운동에 대해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손의 이런 생각이 혹여 괘씸할지도 모르겠지만, 할머니도 굳이 그런 것을 희망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무엇을 과시하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당시에 독립운동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지, 여자는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남자들의 굳은 생각을 깬 선구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지금이라도 할머니가 하신 일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시복(동생)이 보훈처에 있을 때 할머니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죠. 그 뒤에 말이 없었습니다만. 앞으로 새롭게 조명되면 나라를 위해서도 좋겠지요.”

- (영정 사진으로 쓰고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이것은 언제 찍은 건가요?
“이 사진 옆에는 원래 아버지가 서 있었습니다. 영정 사진으로 쓰느라고 옆에 있던 사진을 잘라냈지요. 길림에 있는 어느 감옥으로 동지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가 찍자고 권유해서 촬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 때문에 얼굴이 알려져서 일제 경찰에 잡혔다는 얘기가 있어요. 할머니의 운명을 좌우한 사진이 되어버렸지요. 이 사진 원본은 6·25때 잃어버렸습니다.”

- 긴 시간(2시간이 훌쩍 지났다)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위해 애써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김시련 씨 부부는 대문까지 따라 나오시며 집까지 찾아온 손님인데 점심 대접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사래를 치고 나오며 몇 번 절을 했다. 소낙비가 거짓말같이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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