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기억記憶

2018-03-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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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트라 I.11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개인의 기억’
기억은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정교한 회로(回路)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경험을 통해 축척한 기억의 집합이다. 그러나 기억의 위치를 분명하게 밝힐 수 없다. 기억은 신경계의 유령이다. 뇌에 널리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변한다. 기억들은 독립적으로 뇌에 저장돼 자생적으로 서로 연결해 내가 경험하지 않은 정보들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내가 무심코 걷는 것, 말하는 것,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일상에 꼭 필요한 행위들은 기억을 통해 완성된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기던 게임을 기억하거나 오래 전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올라 온 국민들이 응원하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나의 현재를 지배한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운전하고 요리를 하고 책을 읽는 능력은 필요에 의해 작동된 기억의 활동들이다. 혹은 유인원이었던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도록 만든 유전적 기억도 있다. 찰스 다윈이 주장한대로, ‘자연선택’을 통해 생존과 번식을 가능하게 만든 최적화된 유전적 기억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도약시킨 문화적인 기억인 ‘밈(meme)’도 있다.
 

오스트리아 멜크수도원 도서관. [사진=베철현 교수 제공]

기억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나’라는 개인이 기억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기억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킨다. 고생물학자들은 수천만년 전 공룡의 뼈를 발굴하여 동물의 진화에 대한 정보를 추측한다. 그 정보는 학자들에 의해 분석된 후, 활자화와 디지털화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www’에 탑재돼 누구에게나 그 정보가 공유된다. 도서관은 이런 기억의 저장창고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 있는 멜크 수도원에 저장된, 구전으로 전달된 다양한 이야기들과 노래들이 고대 그리스와 라틴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이 동원되어 저장되어 있는 장소다. 책, 컴퓨터, CD, DVD, 그리고 다른 전자기록방식은 인간의 기억을 보존하는 그릇들이다. 이 그릇은 IT혁명으로 거의 무한대로 확장하였다.

문화적인 유산이 인간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동물들도 축적된 지식을 전수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용한다. 척추동물뿐만 아니라 무척추 동물들도 생존을 위해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디에서 음식을 찾아야 할지,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약탈자들은 누구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안전하게 움직여야 하는지, 누구와 짝을 지어 번식하는지와 같은 복잡한 정보들도 안다. 이 본능적인 지식들도 오랜 진화를 거쳐 문화적인 기억 속에 새겨진 내용들이다. 독수리는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자신의 뇌 속에 축적된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사냥훈련을 시킨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장소를 수천km를 거슬러 올라가 산란하고 죽는다. 고래와 새들은 까마득한 과거에서 전수받은 자신들만의 소리를 통해 소통하고 정보를 주고받는다. 동·식물,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지구와 우주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기조절이라는 기억을 통해 생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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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기억’
인간 문화는 인간들 간에 학습된 내용으로 배움이란 매개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다. 인간이 기원전 8000년경 농업기술을 터득하여 정착생활을 영위하면서 안정된 식생활을 통해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그들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성각문자를 창제하면서 정보를 본격적으로 보관하기 시작한다. 이 토판문서는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우루크(오늘날 알-와르카)에서 발견된 행정문서이다. 이 토판문서에서 동그라미와 반달 모양들은 수량을 의미하고 갈대 철필로 눌러 새긴 글자들은 우루크의 신전 창고에 맡긴 사람들과 농산물들의 이름들이다.

기억의 도구가 문자다. 개인이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핵심내용이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공동의 기억의 산물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Maurice Halbwachs, 1877-1945)은 인간들은 공동체 안에서 거주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끈이며,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기억을 구축하는 일원이 돼 그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매개체란 의미라고 주장한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는 개인의 기억이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억이 아니지만, 이것을 내포하면서도 초월하는 기억인 ‘문화적 기억’이란 개념을 만든다. 그는 한 집단이 지닌 정체성을 그 공동체가 담고 있는 기억의 총체라고 설명한다.
 

우루크에서 발견된 기원전 3100년 수메르어 토판문서.[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인상’
파탄잘리는 인간이 발견해야 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걷어내고 응시해야 할 대상으로 ‘기억’을 언급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마음속에 ‘삼스카라(saṃskāra)’ 즉 ‘인상(印象)’을 남긴다. ‘인상’은 인간이 마주친 수많은 사물이 마음속에 자국을 남겨 심리적인 기억으로 전환된 최소 단위다.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 모든 의도 혹은 시도들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에 자국을 남긴다고 생각했다. 이 인상들은 한 개인의 의도적인 바람을 통해 다시 표면으로 등장할 수 있는 무의식에 잠겨 있다. 이 인상들이 개인의 특성과 습관 더 나이가 그 사람만의 고유한 기질을 결정한다. 기억을 통해 인간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낀다. 인상에 해당하는 ‘삼스카라’라는 산스크리트 단어는 ‘하나로(삼) 모여 만들어진 것(카라)’이라는 의미다. 내가 무심코 떠올리는 잡념이나 행동들도 결국 나의 고유한 정체성과 기질을 결정하는 요소들이다.

오감을 통해 얻은 그 대상에 대한 개별 인상을 ‘프라트야야(pratyaya)’라고 부른다. ‘프라트야야’는 생각(치타브리티)을 구성하는 특수한 내용으로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기억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면들 중 하나를 이른다. 생각을 영화 전체로 비유한다면, 프라트야야는 영화의 정지된 한 장면이다. 그 기억의 한 장면이 시간이 지나가거나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활동하지 않는 잠재적인 ‘인상’으로 남는다.

만일 내가 붉은 장미를 본다고 가정하자. 나는 시각을 통해 장미의 고유한 모습과 붉은 색을 인지한다. 나는 후각을 통해 붉은 장미에서 다른 꽃들이나 다른 색의 장미와는 다른 냄새를 감지한다. 이런 다양한 단면들이 모여 총체적인 정보를 나에게 전달하면 나는 그 꽃을 ‘붉은 장미’로 판단한다. 그러나 내가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붉은 장미’는 내 생각의 저장창고에 보관되고, 그 장미의 다양한 특징들은 ‘인상’으로 내 뇌의 어딘가에 독특한 정보를 지닌 채 숨어 있다. 그 정보는 내가 다시 ‘붉은 장미’를 보게 되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상기(想起)’라고 부른다. 인간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다양한 물건을 오감으로 감지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거의 무한대의 사물에 대한 인상들이 보관되어 있다.

‘파탄잘리의 기억’
파탄잘리는 생각을 지배하는 다섯 가지 유형들 중 마지막 다섯 번째를 ‘기억’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억을 <요가 수트라> 1권 11행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아누-부타-비샤야-아삼프라모샤 스미리티.”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기억이란 경험이 제거되지 않는 과거로부터 나온다.” 기억은 ‘과거의 어떤 경험을 통해 마음 속 깊은 곳에 인상으로 남은 것’으로 아직 마음으로 부터 ‘완전하게 빠져나가지 않은 것’이다. 기억이란 과거에 오감으로 인식했거나 인식했던 어떤 사실이 인상으로 남아 있지만 아직도 마음만 먹으면 회복이 가능한 정보다. 이 인상들이 환경에 의해 슬그머니 빠져나가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은 호수와 같다. 인상들은 그 호수의 바닥에 널려있는 자갈들이다. 만일 호수가 고요하면, 우리는 그 자갈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호수가 요동치고 물결이 생기면, 우리는 그 자갈들을 볼 수도 없고 꺼낼 수도 없다.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일어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꿈이나 상상력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작위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본 것이 실제 경험한 것처럼 생생한 경우도 존재한다.

‘기억’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단어는 ‘스므리티(Smṛti)’다. 스므리티는 힌두교에서 공동체가 기억하여 문자로 남긴 문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므리티는 종교의 가장 중요한 문헌들인 ‘스루티(Shruti)’와는 구별된다. ‘스루티’ 즉 ‘직접 들은 것’은 성인들의 언행을 직접적인 경험인 ‘들음’을 통해 그 들음을 문자화한 것이고, ‘스므리티’는 ‘스루티’를 후대 필사자들이 기억해 옮겨 적은 이차적인 작업이다. 파탄잘리도 ‘기억’이 지닌 불완전한 요소를 강조한다. 직접 경험이나 간접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인상’ 속에 아직 생존하는 어떤 것이다.

기억은 이중적이다. 나에게 정체성을 주기도 하고 나를 과거의 기억 속에 감금시키기도 한다. 나를 발견하기 위한 수련을 위해서는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조약돌처럼 모인 기억의 조각들을 응시해야 한다. 그 조각들이 나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무심코 떠오르는 이 기억들은 내가 완성해야 할 미래의 나의 모습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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