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⑭] 아들이 본 수당 "어머니 마지막 소원은 통일"

2018-04-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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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이 연재물의 주인공 수당 정정화와 남편 성엄 김의한의 외아들이다. 1928년 상해에서 태어나 망명지 중국에서 자랐고, 1946년 열아홉 나이에 조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부터, 아버지 어머니와 삼촌, 그리고 사촌형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집안. 왜놈 감옥에도 갇히지 않았던 어머니가 해방된 조국에서 옥살이를 겪고, 아버지는 동란 와중에 납북된 기막힌 가족사. 어느덧 구순이 넘은 그에게 어머니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충칭 남쪽 치장에서 (임정 식구들이) 작은 마을을 짓고 살았어요. 애들이 다툴 때가 있지요. 그러면 어머니는 항상 저만 나무라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만 혼이 나나 싶어, 한번은 따졌더니, ‘얘, 그런 소리 꺼내지도 말아라. 서로 제 자식 감싸면 어떻게 되겠니? 어른싸움 난다.’ 이러시는 겁니다.”
수당은 “양대판서집”으로 불린 명가(名家)의 딸이고, 성엄 역시 안동김씨 세도집안의 아들. 개화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세 당당한 양반집 자손으로서 피해의식이나 우월감 같은 게 한 조각쯤 남았을 법도 하다.
“아니 그런 건, 우리 집안에는 없었어요. 중국에서 항일 관계하던 분들 중에 양반 이런 거 따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임정 요인 부인들 가운데 일자무식인 어른도 적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어느 분과도 친하게 지내셨어요. 굳이 말하면, 지역감정은 조금 있었는데. 어머니 같은 기호(畿湖) 사람들은 그것도 없었고요.”
 

[2006년 10월 1일 부친 성엄 김의한의 묘소(평양 재북인사묘역)를 찾은 김자동 회장 부부.]


임시정부가 1만 리 피난길을 떠난 게 1938년 초. 80년이 지난 옛일이건만, 김자동 회장에게는 그때가 엊그제 일만 같다.
“제가 5학년 들어갈 무렵이었어요. 그날이 2월 초하루라서 기억해요. 어머니께서 분주히 짐을 꾸리셨어요. 창사에 가서, 저는 좋았지요. 그전에는 중국 애들에게 둘러싸여 외톨이였는데, 우리나라 애들과 놀 수 있으니까. 어른들한테는 피난살이가 고되었겠지만, 어린 저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배 위에서 사십일을 보냈는데, 애들하고 숨바꼭질하고 뛰어다녔어요. 백범 선생님 아드님들과는 형제처럼 지냈어요. 거기서는 다 형제들이었어요.”
충칭에서 임정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푸성귀 같은 건 심어서 먹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서툴렀던 일이 농사. 수당은 무령을 떠나면서, 페달을 떼어내 휴대하기 간편하게 개조한 재봉틀을 갖고 갔던 모양이다. 김 회장 또래였던 희옥이(오광선 선생의 따님) 식구들이 수당 식구들 몫까지 농사를 짓고, 어머니는 희옥이네 옷이며 이부자리를 몽땅 만들어줬다.
“중국 학교에서도 옛날 글은 한문(漢文)이라고 해요. 한문시간 때 제가 중국 친구들에 비해 못하지 않았는데, 어머니 실력에는 많이 뒤졌어요. 어머니는 신학기가 되면 제 교과서를 먼저 공부해서 영어도 가르쳐주셨어요.”
내년은 임시정부 수립 1백주년이자 김 회장의 조부와 부친이 망명한 지 1백년이 되는 해다. 동농은 임시정부 고문으로 망명지에서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있던 시절 의병장을 잡아들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당시 일제헌병대의 기록에는 일본군의 짓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로 현재 독립운동 서훈이 보류돼 있는 상태다.
“할아버님이 상해에 누워 계세요. 장소는 알아요. 백년이 넘었으니 유골이나마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국 땅으로 모셔야 해요. 지금 할아버님 서훈이 보류돼 있는데, 그것도 마무리해야 하고요.”
김 회장은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와 <민족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6~70년대 내내 번역 일에 종사했고, 80년대 중반 자동차부품회사를 경영했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설립한 건 2000년대 들어와서다.

[상해에 있는 동농 김가진의 묘소.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아이들이 할아버님 기념사업회를 만들자고 했어요. 내가 반대했어요. 대개 여유가 좀 생겼다고 시작을 했다가 자손들에게 넘어가면 유야무야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가족만 독립운동 한 것도 아니고요. 형편이 안 되어, 선대의 헌신을 기리지 못하는 후손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래서 이왕 하려면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일을 하자고 했어요.”
2006년 10월 1일, 김 회장은 북의 초청과 남의 허가를 받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함께 평양 교외 용성지구에 조성된 재북인사묘역을 방문했다. 처음으로 찾은 아버지의 묘소. 김 회장은 부인 김숙정 여사와 함께, 어머니의 사진을 묘비에 세우고, 국립대전현충원 모친 묘소에서 떠온 흙 한 줌을 부친의 묘 주변에 뿌렸다. 이렇게, 김 회장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56년이라는 한 맺힌 세월을 넘어 다시 만났다.
“젊은 사람들이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면서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 수립을 1948년 8월 15일이라고 우기는 건 잘못됐다고 봐요. 헌법 전문을 보세요. 상해에서 임정이 수립된 날이 대한민국이 수립된 날이에요. 반쪽짜리 나라를 세운 걸 건국절이라고 하면, 통일은 어떻게 할 거에요? 어머니 마지막 소원이 통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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