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한국에 머크·발렌베리가 없는 이유

2018-07-1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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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오 성장기업부 부장]

# 경기도 부천에서 화장품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 A사는 2년 뒤로 계획된 가업 승계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자수성가해 일흔이 넘은 창업주는 장남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싶지만 최근의 시장환경 등을 따져봤을 때 세금을 내면서까지 가업을 이어줄 만큼 성장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남은 오랫동안 해외 유학생활을 했던 터라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이용하기 위한 조건 중 ‘재직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도 상속포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 경기도 화성의 축산물 가공업체 P사장은 최근 "자식들까지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며 가업승계가 아닌 회사를 처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고생하며 기업을 꾸려봤자 빚만 대물림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복잡하고 일방적인 대기업 하도급 구조와 점점 높아지는 임금 때문에 중소기업 경영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상황"이라며 "한국과 같은 불합리한 가업승계 세금제도를 고수한다면 고용 창출과 국가적·사회적 가치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업 경영 환경이 대내외적으로 요동치는 가운데 가업 승계를 앞둔 국내 중소 기업들이 상속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부가 올해부터 가업 승계 공제 요건을 강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들이 다양한 가업 승계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 행보다.

우리나라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50%로 최대주주 주식에 대한 할증평가까지 더하게 되면 65%에 이른다. 이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인 26.3%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에 따라 대기업처럼 많은 금액을 사내유보금으로 쌓아 둘 수 없으며, 대부분의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재산 대부분이 기업에 투입되어 있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특성상 상속증여세 재원마련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최근 정부는 세법 개정을 통해 올해부터 300억원 한도 공제 대상을 ‘가업 15년 이상 영위’에서 ‘20년 이상’으로, 500억원 한도 공제 대상을 ‘가업 20년 이상 영위’에서 ‘30년 이상’으로 각각 조정했다. 예년보다 5년에서 10년가량이 늘어난 것이다. 가뜩이나 높은 상속세율 부담을 안고 있던 국내 기업들은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까지 증여세(3개월 이내) 및 상속세(6개월 이내)를 자진 신고하면 7% 세액공제를 해줬던 것도 올해부터는 5%, 내년부터는 3%로 크게 낮아진다. 정부가 대표 장수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가업상속공제제도의 경우 요건이 까다로워 제한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직전 3개 연도 평균 매출이 3000억원 미만이어야 하고, 상속받기 직전 2년간 정규직 근로자 수의 평균 80% 이상을 10년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혜택도 생각만큼 크지 않다. 10년 이상 유지한 가업이라도 전체 지분 중 200억원 정도만 세금을 면제하고 나머지 지분은 50% 세율이 적용된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받은 중소기업은 전체 350만여개 중 60곳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매년 조건이 강화돼 20년 이상 가업을 꾸리면 적용되던 최고 500억원의 공제한도가 올해부턴 30년 이상일 경우에만 가능해졌다.

계획없이 가업승계를 진행하게 되면 상속증여세금의 납부재원을 만들지 못해 경영권을 잃거나 기업을 매각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세계 1위 손톱깎이 업체 쓰리세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창업주 김형규 회장이 2008년 타계하면서 유족들에게 약 15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유족들은 돈을 마련하지 못해 회사 지분을 매각했다.

국내 최대의 콘돔 제조사이자 한때 세계 1위였던 유니더스 도 마찬가지다. 김성훈 유니더스 대표는 창업주인 선친 김덕성 회장이 지난 2015년 세상을 떠나면서 물려받은 100억원이 넘는 회사 주식에 대해 50억원이 넘는 상속세를 부과 받았다. 김 대표는 한때 세금 분할 납부를 신청하며 회사 경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지만 상속세를 낼 재원이 부족했고 결국 지난해 11월 바이오제네틱스투자조합외 1인에게 매각했다.

국내 1위의 종자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농우바이오 역시 상속세 부담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설립된 이 회사는 지난 2013년 창업주인 고희선 회장이 별세하면서 상속세 폭탄을 맞았다. 당시 매출액은 676억이었는데, 유족들에게 부과된 상속세는 1000억원이 넘었다. 상속세를 낼 돈이 없었던 유족들은 결국 회사를 매각했다.

반면 일본은 상속세율이 55%로 한국보다 높지만 최근 일본 정부가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중소기업 상속 때 세금을 대폭 감면해주는 분위기다. 고령화와 일손부족으로 경쟁력을 지닌 중소기업들이 자진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기업의 존속과 일자리 보존이라는 사회적 이익 실현에 중점을 두고 가업승계 혜택을 늘리고 있는 일본의 인식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국내 상황에서 350년 역사의 화학·제약사 독일 머크, 150년 기반의 스웨덴 뿌리기업 발렌베리 재단, 120년 전통의 초콜릿 명가 미국 허쉬와 같은 글로벌 명문 장수기업 탄생을 기대하기 힘들다. 

경제 전문가들도 이 같은 현실을 방치할 경우 머지 않아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명문 장수기업의 힘은 오랜 노하우와 신뢰를 바탕으로 악조건 속에서도 이윤추구와 지속성장이라는 본래의 경영적 측면 외에도 사회공헌 측면에서 모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향후 한국 산업의 먹거리 100년을 책임질 차세대 중소기업 리더를 육성하는 데 사회 전체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업계가 적극 나서 중소기업의 안정적 영속을 뒷받침할 효율적인 승계 시스템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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