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그날]복날 조선임금이 나눠준 얼음쿠폰 '빙표'를 아세요

2018-07-1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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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과 여름의 역사

오늘 초복(7월17일). 때 맞춘듯 기승인 염천(炎天) 아래 시원한 것 생각이 절로 난다.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어 옛날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많은데,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풍경이 딱 그렇다.
 

[1982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얼음리어카 배달청년들.]


36년전인 1982년 7월 8일자 신문에는 흰 러닝속옷만 걸친 채 커다란 얼음이 든 리어카를 끌고 도심을 주행하는 두 청년의 뒷모습이 보인다(동아일보 김경제 기자 촬영). 이날 낮 최고기온은 서울이 32.3도였다. 지금보다 폭염이 덜했지만, 냉장고가 드문 도시를 덮친 찜통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절엔 동네 곳곳 얼음집이 있었고, 직원들은 땡볕에 얼음이 녹을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배달에 여념이 없었다. 이 풍경이 몹시 낯설어진 것은, 냉장고가 일상의 중심으로 들어와 앉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들 줄 알게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876년 독일인 칼 린데라는 사람이 암모니아를 냉각제로 활용하면서 냉동냉장이 가능해진다. 전기로 냉각이 가능한 가정용 냉장고가, 세계 최초로 미국에 등장한 때는 1913년이었다. 냉장고의 역사는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인간에게 선물한 '차가움'의 복음은 일상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할 만하다. 

# 3000년 전 여름에도 얼음을 썼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여름은 어땠을까. 삼복(三伏)더위 첫 고개인 초복의 문턱을 넘으며, 그 시절 '여름왕국'으로 잠깐 시간여행을 가보는 건 어떨까.
 

[영화 '관상'의 한 장면.]



2013년에 나온 영화 '관상'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관상가인 김내경이 이름이 나자, 사람들이 자신의 관상을 봐달라고 몰려드는데 그들의 손에 산삼·곶감 따위와 함께 얼음 한 덩이가 매달려 있다. 이 분은 조선 천지에 어디서 얼음을 구했으며, 그걸 '로비용'으로 쓰고 있는 게 과연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일일까. 

냉장고처럼 냉각제나 전기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이전에도 얼음을 여름철에 사용하는 지혜는 있었다. BC 1700년경 시리아 남동부의 마리라는 국가의 왕은 유프라테스강 근처에 빙고(氷庫, 얼음창고)를 지어 얼음을 보관했다. BC 1000년경에 채록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시경('빈풍'의 '7월')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12월이 되면 얼음을 탕탕 깨서
3월에는 능음(凌陰, 얼음창고)에 넣네

중국 협서성 옹성에선 BC 7세기 진나라의 얼음창고 유적이 발견됐고, BC 3세기 진시황은 지하 17m에 거대한 단지를 묻고 빙고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얼음을 저장보관하는 시설은 3700년 전부터 만들어져왔다.]



# 고려시대 '빙고의 민주화'?

우리나라도 일찍부터 빙고를 사용했다. 신라에선(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 겨울이 되면 빙고에 얼음을 저장했으며, 빙고를 관리하는 빙고전이란 관청을 두었다. 고려시대엔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頒氷)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얼음을 채취할 때는 사한제라는 제사를 지냈다. 고려시대엔 얼음을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1244년 권력자였던 최이는 겨울에 얼음을 확보한 뒤 자신의 집안 빙고에 저장했다. 1298년엔 정부가 나서서 누구나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조선이 개국한 지 4년 만인 1396년 수도 한양에는 서빙고와 동빙고가 만들어진다. 서빙고가 훨씬 컸다. 얼음의 저장량도 동빙고의 13배 정도였고, 저장창고도 동빙고는 1개인 반면 서빙고는 8개나 됐다. 동빙고의 얼음은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쓰였고,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관리들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궁궐의 얼음수요를 맡은 곳은 내빙고였고, 얼음 전체 관리는 예조에서 담당했다. 왕실뿐 아니라 지방관청에서도 빙고를 관리했다. 현재 남아있는 경주, 현풍, 창녕, 안동, 청도, 영산, 해주 등의 석빙고 시설은 조선시대 지방에서 이용하던 얼음보관 시설이다.
 

[경주 석빙고의 내부 구조. 사진=네이버]



# 겨울 뚝섬에서 얼음덩이 채취

겨울에 얼음을 채취할 때는 현재의 뚝섬 지역으로 가서 한강의 얼음을 깨서 썼다. 1월 소한과 대한 사이에 채취가 이뤄졌으며 얼음이 12㎝ 정도가 되는 것을 골랐다. 얼음 한 덩이의 크기는 가로 80㎝에 세로는 1m였다. 이 얼음덩이를 우마차를 이용해 석빙고로 옮긴 뒤 볏집과 쌀겨를 덮어 층층이 쌓았다. 한해에 13만개까지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양력 3월말(춘분)에 개빙제(開氷祭, 빙고를 여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얼음을 출하하기 시작해, 일곱달 동안 '가동'하고 10월 상강(입동 직전인 10월 하순경)에 빙고를 닫는다. 

이렇게 관리된 얼음들은 누가 어떻게 사용했을까. 경국대전의 '반빙'조를 들여다보자. 

# 빙표 받으실 분? 대개 왕실과 고관들

"해마다 여름 끝달(음력6월)에 관사의 종친 및 문무관 중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리), 내시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눠준다. 또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지급한다."

주로 고위관료가 대상이었으며 은퇴한 이들도 배려했다. 눈에 띄는 것은 환자들과 죄수 등, 건강상 위급한 이들을 처치하는 도덕적 실천을 위해 얼음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왕실의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정의 노고를 치하하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세운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장빙고의 얼음을 훔쳐가는 도적이 생기기까지 했으랴. 선조18년(1585년) 사헌부에서 "서빙고에서 얼음을 도둑맞아 여름도 지나기 전에 창고가 비어간다"(정언 류덕수)는 보고가 올라와 있다.

# 빙고 도둑까지 설쳤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것처럼 6월에 주는 대상 외에 , 각 관청은 5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 석달간 얼음 쿠폰을 받을 수 있었다. 또 궁중의 각 전(殿)과 주방은 2월부터 10월까지 언제든지 내빙고를 통해 얼음을 쓸 수 있었다. 

국왕이 얼음을 하사하는 방식은 빙표(氷票)라는 일종의 쿠폰을 주는 것이었다. 빙표를 장빙고에 가져가면 적힌 숫자만큼 얼음을 내준다. 빙표가 병자와 죄수에게 지급되는 경우는, 위급 위중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빙표 혜택을 누리는 핵심대상은 궁궐 내 국왕의 주변과 당상관 고관들을 비롯한 관리들이었다. 특히 왕실의 경우는 1년내내 얼음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여름철의 음식 보관 관리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위생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청도의 석빙고 시설.]



# 겨울의 빙고 부역과 여름의 얼음호강 사이

갈수록 얼음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고, 빙고의 공급 용량은 한계에 다다른다. 1454년 단종2년 사헌부는 "국가 빙고의 얼음이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과 종4품의 대부 이상과 각사에서 얼음을 보관토록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 보관시설을 가질 수 있는 대상자를 늘리도록 한 것이다. 얼음 개인 창고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장빙고에서 받은 얼음을 일단 보관해 두었다가 제사에 쓰는 경우도 많았다. 또 18세기엔 한강변을 비롯한 어촌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제공하는 개인 빙고시설이 있었다. 

조선이란 나라에서 얼음은, 제사 음식을 신선하게 올리기 위한 정성의 표현이었고, 더위에 지친 노약자와 병자를 치유하는 구제의 수단이었으며, 여름의 양기를 얼음으로 절제하는 철학적 명분을 담은 '근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권력자들의 '피서(避暑)'를 위해 겨울철 강촌 주민들을 빙판으로 내몰아 동상에 걸리게 하고 얼음에 넘어져 골절상을 입게 하는 '빙고 부역'을 가중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복날 빙표 쿠폰을 들고 얼음을 받아 더위를 식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있고 돈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조선의 여름은 민초에겐 언감생심의 빙고였다. 그래도, 우리의 선조들이 겨울철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을 만들어 더운 날 활용할 줄 아는 지혜를 일찍부터 지녔다는 점만은 인상적이다. 언제든지 냉장고 문을 열면 얼음과 냉기를 누릴 수 있는 시절이 새삼 감사하기도 하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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