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④] "민족의 무지가 나라 잃게 했구나" 인생 바꾼 묘표사건

2018-08-0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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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다

[윤봉길 의사 농민운동 기록화-이종상 화백 그림]

목바리 장사, 매헌
학문과 문재(文才)에 뛰어난 매헌은 성정(性情)이 불같고 기골(氣骨)마저 장대했다. 한 자리에서 국수 다섯 그릇을 단숨에 비울 정도로 먹성도 좋았고, 힘도 장사였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된 무렵, 마을 청년들이 채석장에서 상석(床石)을 만들기 위해 옮겨온 돌을 갖고 힘겨루기를 했다. 이때 마을 어른 중 한 분이 “이 돌을 드는 사람을 우리 마을의 장사로 인정하지”란 제안을 했다.
힘깨나 쓰는 장정들이 서로 나서서 힘을 썼으나, 얼굴만 빨개질 뿐 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매헌이 돌 앞에서 자세를 잡더니 ‘이얍’하는 소리와 함께 돌을 번쩍 들어올렸다. 장사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마을 청년 모두가 ‘와!’탄성을 지르며 매헌을 우러러봤다. 이렇듯 매헌은 마을 청년들의 리더로, 마을 일에 솔선수범하는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해 주변 어른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한편 매헌은 오치서숙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집안의 맏이로서 틈틈이 동생들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17세 무렵, 매헌은 마을어른들의 부탁으로 동생 남의(南儀)를 비롯해 예닐곱 명 아이들에게 본격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그의 교육 방법은 매우 엄격하고 독특했다. 일례로 오늘 가르쳐 준 것을 다음날 질문해 잘 모르면 벼락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특히 동생들에게는 더욱 엄격했다.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면 ‘이럴 거면 공부하지 말고 가서 밭이나 일구라’며 손에 호미를 쥐어줬다. 남의는 눈물이 쏙 빠지면서도 형님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이 효과를 냈는지 남의는 물론 여동생들까지 빠른 시간에 한글을 깨쳤다. 이처럼 불같은 매헌의 성정(性情)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1920년대 공동묘지 모습.]


매헌 생애의 큰 전환점이 된 묘표사건
1926년 10월 오치서숙을 마칠 무렵, 매헌은 충격적인 일을 접했다. 오치서숙에서 글을 읽던 매헌은 잠시 덕숭산 쪽으로 산책을 나왔다. 그때 공동묘지 쪽에서 가슴팍에 나무더미를 한아름 안은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매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매헌이 무슨 일인가 싶어 “무슨 일이오”라고 묻자 청년은 “저기, 혹시 글을 좀 읽을 줄 아슈?”진지한 투로 물었다. “그렇소만…”매헌이 답하자 “아이고,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먼유! 이것들 중에서 울 아부지 것 좀 찾아주시유. 지가 까막눈이라…”청년은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매헌 앞에 나무더미를 내려놓았다.
널브러진 나무들은 공동묘지에서 뽑아온 묘표(墓標)였다. ‘김선득’이라 쓰여진 청년 부친의 묘표를 찾아 건네주자, “이게 울아부지 거가 맞남요?”매헌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댁이 찾는 아버지의 묘표가 확실하다”는 매헌의 말에 청년은 “이제야 아부지 산소를 찾게 되었구먼유! 아부지 이 불효자가 왔구먼유!”묘표를 얼싸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매헌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매헌은 대수롭지 않게 가던 길을 가려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만 여보시오. 이 묘표들마다, 어느 묘지에서 뽑았는지 표시는 해두었소?”“글씨,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구먼유!”청년은 그저 아버지의 묘표를 찾았다는 것에만 기뻐 싱글벙글 할 뿐이었다. 매헌은 어이가 없어 호통을 쳤다. “아니, 그럼 그것을 그냥 뽑아왔단 말이오? 당신 아버님 푯말은 찾았지만 무덤은 못 찾게 되었소.”
청년은 무슨 뜻인지 몰라 매헌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매헌은 분통이 터져 “당신 아버님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덤까지도 죄다 잃어버리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이오!”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청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茫然自失)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 할 바 몰라 통곡하는 청년을 보며, 매헌은 ‘아아! 무지가 죄로구나! 한 사람의 무지는 무덤을 잃게 하지만, 민족의 무지는 나라를 잃게 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서럽게 우는 청년의 모습이 우리 조국의 현실을 보는 듯해, 무지가 일제의 탄압과 수탈보다도 더 무서운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묘표사건은 매헌에게 커다란 충격과 절망감을 안겼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문맹퇴치운동’이란 뚜렷한 좌표가 설정되었다는 것에 매헌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매헌이라는 아호를 얻다
묘표사건이 있은 후 어느 날, 오치서숙 성주록 선생은 매헌을 따로 불러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출중한 스승을 찾아 떠날 것’을 권유했다. 뜻밖의 스승의 말에 매헌은 계속 훈도해 주실 것을 간청했으나 이미 뜻을 굳힌 스승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매곡 성주록 선생은 재능과 기개가 출중한 제자 매헌에게 아호를 지어 주었다. 자신의 아호에서 매(梅)와 제자 마음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섬기는 성삼문 선생의 호 매죽헌(梅竹軒)에서 헌(軒)자를 떼어 매헌(梅軒)이라 했다. 매헌이란 아호에는 ‘동지섣달 설한풍(雪寒風)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속성과 성삼문 선생의 지조와 절개를 이어받아, 이 난세에 굴하지 말고 뜻을 이루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매헌은 스승의 은혜에 거듭 고마움을 표하며, 8년간 정이 든 오치서숙을 물러나왔다. 매헌이 그의 아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컸고, 그 깊은 뜻을 평생 가슴속에 새겨 왔다는 것은 상해의거로 드러났다.
 

[부흥원 현재 모습]

야학(夜學)에 투신, ‘문맹퇴치운동’의 뜻 펼쳐
오치서숙을 물러나올 때 그의 나이 열아홉. 묘표사건의 생생한 체험이 가슴 한켠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다. 그 사건 때 이미 매헌에겐 ‘문맹퇴치운동을 통한 농촌부흥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란 뚜렷한 목표가 정해졌다. 이후 그는 피폐한 농촌의 생활상을 관찰하며 진지한 고민을 거듭해 왔다. 뿌리 깊은 가난으로부터 못 벗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란 생각으로 모아졌다.
일단 뜻이 정해지면 밀어붙이는 것이 매헌의 특성이다. 마침내 매헌을 친구 이상으로 믿고 따르는 오치서숙 동접들을 모아놓고 야학당에 대한 자신의 심중을 밝혔다. 이미 매헌으로부터 묘표사건에 대해 들었기에,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시작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어떻게 그 뜻을 실행하느냐로 의견이 분분했다. 만나는 횟수를 더하며 의견을 좁힐 수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장소였다.
성미가 급한 매헌은 “야학당을 제대로 마련하자면 그 또한 적지 않게 시간이 걸릴 것이오. 그러니 우선 우리집 사랑방에서라도 시작합시다.”매헌의 제안에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매헌은 예산 시내에 나가 야학에 쓸 물품까지 구입해 왔다. 마침내 추수도 끝나, 일손을 놓고 있던 마을사람과 어린아이들이 속속 매헌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향학열보다는 구경반 호기심 반으로 모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대로 구색을 갖춘 야학당에 사람이 몰려드니 매헌과 친구들은 흐뭇했다.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월사금을 안 내고 무료로 공부를 시킨다는 것에 대한 부모들의 부담, 여식을 둔 부모는 밤길 걱정, 먹고 살기도 힘든데 글은 배워 뭐하느냐는 등등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김원상 여사는 ‘배움은 사람이 누려야할 보편적 가치’라는 확고한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못마땅해 하는 남편을 설득시키며 물심양면으로 야학을 지원했고, 매헌도 마을어른과 부모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열정을 다하는 매헌의 진심이 느껴지자 부모들도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서지 않았다. 서서히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몇 달이란 시간이 흐르자 야학당은 제법 그럴싸하게 틀이 잡혔다.
당시 덕숭산 묘표사건의 뼈아픈 체험은 매헌 생애의 큰 전환점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배움의 소중함을 머리와 가슴으로 깨닫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뜻을 세우는 단초(端初)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매헌은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에 투신했고, 농민계몽운동 더 나아가 구국 항쟁의 발판을 마련했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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