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냉면 발언’ 진실과 오해 사이

2018-11-0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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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전북에 서운하다.” 참여정부 초기다. 전북을 방문한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공식 석상에서다. 당시 전북 여론은 참여정부와 노 대통령에게 서운한 상태였다. ‘홀대’ 받았다는 불만이 스멀스멀 번지던 때다. 그런데 노 대통령 입에서 거꾸로 “전북에 서운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앞뒤 맥락을 자른 채 이 대목만 확대하면 사달이 날법했다. 그러나 당시 취재 현장에 있었던 필자를 포함해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언이 나온 배경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날 노 대통령은 자신이 전북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 하나하나 열거했다. 새만금특별법 제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면서 이런 노력을 몰라주는 전북에 서운하다고 슬며시 눙친 것이다. 말하는 노 대통령도, 듣는 전북인도 웃으며 지나갔다.

그런데 의도를 갖고 뒤틀면 전혀 다른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 다음날 신문에 “노 대통령 전북에 막말” “전북 홀대론 확대”로 도배되기에 충분했다. 현장 분위기를 모르는 지역민들 입장에선 분통터질 발언이다. 전북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경선에서 노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차있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광주에서 1위로 올라서며 극적인 반전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후 다른 지역에서는 이인제 후보에게 밀리며 지지부진했다. 결정적인 기회는 전북에서 왔다. 노 대통령은 전북 경선에서 정동영과 이인제를 2, 3위로 제치고 1위로 기사회생했다. 전북은 지역 연고가 있는 정동영을 뒤로한 채 노 대통령을 선택했다. 이 때문에 “전북에 서운하다”는 발언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하기 좋은 소재였다.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를 놓고 시끄럽다. 북한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이 남한 경제인들 앞에서 했다는 것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냉면 발언’은 기정사실이 됐다. 자유한국당은 연일 공세 고삐를 죄고 있다. 그동안 줄곧 남북문제에 삐딱한 입장을 견지해왔기에 한국당에게는 호재다. 그런데 국민들 눈에는 정략적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수세에 몰린 처지를 반전시킬 목적에서 ‘냉면 발언’을 불쏘시개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구심이다. 사실이라면 리선권 발언은 무례하며 사려 깊지 못하다. 남북 대화 국면에서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다. 그러니 앞뒤 맥락을 잘 헤아려야 한다. ‘냉면 발언’에는 세 가지 시선이 있다.

첫째 언어 습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라도와 경상도만 해도 언어습관에 격차가 있다. 노혜경 시인은 전라도와 경상도 갈등을 언어습관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경상도 사람에게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는 속을 들어 내지 않는 ‘간보기’다. 반면 전라도 사람에게 경상도 사투리 ‘뭐꼬’는 무례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이웃하며 왕래해 왔다. 반면 남과 북은 70년을 떨어져 살았다. 언어습관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북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일 없습니다”만 해도 그렇다. 괜찮다는 뜻이지만 싸가지 없이 들린다. 아마 리선권 위원장 딴에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한 발언이 아닌지 넓게 헤아려본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최고지도자가 깔아놓은 판에서 2인자가 불경한 태도를 보이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둘째 만일 정말 무례했다면 즉시 항의하고 바로잡아야 했다. 철 지난 뒷 담화는 남남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 그 자리에는 원로 기업인 손경식 회장이 자리했다. 또 세계적인 기업을 경영하는 오너들이 있었다. 무엇이 두려워 할 말을 못했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셋째 백번 양보해도 국민감정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공식 석상에서 발언이라면 정부 차원에서 문제 삼고 바로잡는 게 맞다. 하지만 식사자리 발언을 문제 삼아 열흘 넘도록 공세를 펼치는 게 온당한지 묻고 싶다. 거꾸로 남한 당국자 실언을 빌미로 인사 조치를 요구해 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한국당은 벌떼처럼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 리선권에 대해 책임은 김정은 위원장 몫으로 남겨 두자. ‘냉면 발언’ 때문에 어렵게 시작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망가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 한반도는 전쟁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 누리는 평화는 얼마나 값진가. 남북문제는 인내와 포용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엽말단에 집착하면 그르치기 십상이다. 한국당은 집권 당시 ‘통일 대박론’을 외쳤고, 독일 드레스덴에서는 대북 3대 제안을 했다.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면 자기부정이다. 진정 한반도 평화를 바란다면 판을 깨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진심만큼 강한 무기는 없다. 1970년 12월 독일 수상 빌리 브란트는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폴란드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 꿇었다. 비굴하거나 나약해서가 아니다. 당시 언론은 “무릎 꿇은 것은 한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당이 남북평화를 위해 진심을 다한다면 다시 일어 설수 있다. 한국당이 제1야당으로 남북평화를 위해 진심을 다한다면 국민들은 다시 손길을 내밀 것이다. 그런 한국당을 기대하는 게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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