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용의 CEO열전] ⑩ 창사 이래 최대 위기처한 한국 유니클로... 야나이 다다시 회장의 해법은?

2019-07-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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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회장

창업 35년만에 세계 최대 규모 SPA 브랜드 세워... 촌스러운 브랜드라는 위기도 히트 상품 발굴로 극복

한국 불매운동이라는 두 번째 위기 직면, 2조엔 매출 달성 계획 빨간불

패스트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의 한국 사업이 시작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한·일무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본사 임원의 경솔한 발언이라는 악재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시작은 오카자키 다케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최고재무책임자(CFO)의 경솔한 발언이다. 그는 지난 11일 도쿄에서 열린 실적 발표에서 "한국에서 벌어진 불매운동이 이미 매출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면서 "장기적으로 매출에 영향을 줄 만큼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 유니클로 등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확대됐고 유니클로의 제품은 30%가량 판매가 감소했다.

때문에 유니클로는 지난 17일 에프알엘코리아를 통해 "패스트리테일링 그룹 결산 발표 중 있었던 임원 발언으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한차례 사과했으나,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논란은 더 악화됐다. 에프알엘코리아는 일본 패스트리테일링과 롯데쇼핑이 각각 지분 51%, 49%를 보유한 합작사로 한국 유니클로를 운영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국택배노동조합이 유니클로 제품 배송을 거부하는 등 관련 여론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유니클로 브랜드를 운영는 패스트리테일링(일본)·에프알엘코리아(한국)는 22일 '2019년 제3분기 패스트리테일링 실적 발표회 중 한국 상황 설명에 대한 사과문'을 통해 "임원의 설명에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과 관련해 한국의 고객님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고 두 번째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어 "당시 부족한 표현으로 저희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분들을 불쾌하게 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유니클로는 어떤 회사?

유니클로는 야나이 다다시(71, 柳井正)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이 만든 일본의 SPA(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브랜드다. 스페인의 자라, 스웨덴의 H&M과 함께 세계 3대 SPA로 꼽힌다.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회장.[사진=패스트리테일링 제공]


SPA란 미국 브랜드 ‘갭(GAP)’이 1986년에 선보인 사업모델로, 제품 기획, 디자인, 생산, 제조, 유통, 판매까지 의류 생산 및 유통이라는 전 과정을 하나의 회사가 맡는 의류 전문점을 말한다. 싼 가격에 제품을 대량 유통할 수 있고, 소비자의 요구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패스트푸드와의 유사성에 주목해 ‘패스트 패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니클로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티셔츠와 바지를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의 의류를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브랜드다. 1984년 야나이 회장이 히로시마에서 1호점을 설립하고 35년만에 유니클로는 시가총액이 63억달러(약 7조5000억원)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전 세계 22개국 2000여개의 매장에서 약 1조7610억엔(19조2000억원, 2018회계연도 기준)의 매출을 거뒀다.

◆자그마한 옷 가게를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야나이 회장은 작은 옷 가게였던 유니클로를 전 세계에서 손 꼽히는 의류 생산, 유통 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일본 최고의 부자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작년까지는 손 회장이 일본 제일 부자였지만, 현재는 야나이 회장이 최고 부자다(4월 포브스 기준).

그가 이렇게 거대한 유통 기업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는 자기 혁신이 바로 그 답이다. 올해로 71살을 맞는 야나이 회장은 "사람들은 의류를 사양 산업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양 산업이란 것은 없다. 사양 기업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야나이 회장은 1949년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해에 신사복을 판매하는 자그마한 매장을 열었다. 아버지가 시작한 이 자그마한 매장이 바로 유니클로의 시작이다. 야나이 회장은 평범하게 자랐다. 실리콘밸리의 천재 CEO들에게서 볼 수 있는 비범한 일화 같은 것은 없다. 물론 그도 나름 수재였다. 일본의 명문 사립대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수 많은 일본의 CEO와 경제인을 배출한 일본에서도 손 꼽히는 명문 학부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야나이 회장은 좋은 대학을 졸업해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는 인생 설계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공부는 뒷전이고 당시 대학생들에게 유행한 히피와 록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1971년 학교를 졸업한 야나이 회장은 일본의 슈퍼마켓 브랜드인 '자스코(현 AEON 그룹, 미니스탑을 운영 중이다)'에 입사했다. 하지만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인지 9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의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온 그를 반겼다. 자신이 23년 동안 운영해온 양복점 ‘오고리(小郡) 상사’를 야나이 회장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은 아버지의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등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아버지는 강요가 최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야나이 회장에게 200만엔이라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을 주고 세계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혀보라고 권유했다.

야나이 회장은 훗날 이 여행이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밝혔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어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야나이 회장이 유니클로 내에서 직원들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강하게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야나이 회장은 MBA 과정을 밟기 위한 유학을 떠날 것인가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했다. 결국 그의 나이 23세인 1972년 아버지의 상점에 입사해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된다.

오고리 상사는 시골마을의 상점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었다. 하지만 더 성장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야나이 회장은 자신이 대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회사의 문제점을 하나씩 고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변화는 오랜 시간 일해온 직원들에게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야나이 회장의 아버지와 함께 오랜 기간 상점을 운영하던 직원들은 새파랗게 젊은 야나이 회장의 간섭을 거부하다가 결국 의견 차이를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남은 직원은 1명 뿐이었다. 직원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야나이 회장은 그들이 하던 일을 모두 떠맡아야 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야나이 회장은 상품조달, 진열, 판매, 재고관리 등 의류 사업을 위해 반드시 알아둬야 할 점들을 이때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며 그는 기존 의류 유통방식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재고와 반품되는 물건을 걱정해 처음부터 옷 가격을 높게 책정한다는 점이었다. 옷이 비싼만큼 손님들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면 충분히 사업 규모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야나이 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의류업체 갭과 패스트푸드 브랜드 맥도날드의 사업 모델에서 그 답을 찾았다. 햄버거처럼 소비자 기호에 맞는 의류를 빠르게 만들어 유통한다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패스트 푸드처럼 사용자들에게 빠르고 저렴하게 접근할 수 있는 '패스트 패션'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오고리 상사가 22개에 달하는 매장을 보유할 만큼 성장한 1984년 야나이 회장은 신사복 대신 패스트 패션을 판매하는 매장을 설립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히로시마에서 패스트 패션을 판매하는 매장인 '유니크 클로싱 웨어하우스(Unique Clothing Warehouse)', 줄여서 유니클로 1호점을 차렸다. 야나이 회장은 기존 의류점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품 판매에 나섰다. 소비자들이 쉽고 빠르게 제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매장 문을 오전 6시에 열었고, 수많은 옷을 선반에 진열해 소비자들이 이를 직접 입어보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소비자들을 제품을 구매하도록 권유하는 점원들은 모두 없앴다.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이나 패스트 푸드점에 온 것과 같은 감각으로 옷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제품 가격도 1000엔 전후로 책정해 소비자가 부담없이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급성장하는 매출을 보며 야나이 회장은 옷은 패션일 뿐만 아니라 생필품이기도 하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988년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의 상호를 등록했다. 원래 등록하려던 상호는 유니크 클로싱의 약자인 'UNICLO'였지만, 등록 담당자의 실수로 C를 Q로 쓰는 바람에 'UNIQLO'가 되었다. 상호를 등록한 후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의 성장이 정체된 것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갭과 홍콩의 패션 브랜드 '지오다노'를 벤치마킹하기로 결심했다. 지오다노가 갭이 추구하는 SPA 모델로 성공한 것을 보고, 유니클로에도 SPA 모델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SPA는 유통 단계를 줄여 제품 가격을 낮출 수 있지만, 재고와 반품에 따른 손실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제품 판매량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때문에 야나이 회장은 1991년 사명을 오고리 상사에서 패스트 리테일링으로 바꾸면서 제품 판매량 확대를 위해 유니클로의 매장을 매년 30개씩 늘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아주경제DB]


지오다노는 단순히 갭의 사업모델을 벤치마킹하지 않고 자사 나름의 장점을 더했다. 갭이 추구하는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창고형 매장에서 벗어나 제품 디자인 및 진열 방식, 매장 구조 등을 세련되게 배치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야나이 회장은 이를 보고 자신의 패스트 패션 전략에 문제는 없지만, 성공을 위해 세부적인 전술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유니클로에 지오다노 같은 세련됨을 더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의 거품 경제가 사그라들면서 쓸만한 옷을 저렴한 가격에 대규모로 판매하는 유니클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야나이 회장은 패스트 패션의 유통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데 더욱 집중했다. 하나의 옷을 기획해서 생산한 후 판매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2주일 수준까지 줄였다. 1994년 유니클로는 일본에만 100여개의 매장을 설립하며 일본의 대표 패스트 패션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 그해 회사를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대규모 패션 기업으로 거듭났다. 1998년에는 일본 패션의 중심지인 하라주쿠에 플래그십 매장을 내며 당당히 입성했다. 히로시마 출신 싸구려 패션 브랜드가 일본 패션 브랜드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유니클로를 일본의 국민 브랜드로 만들어준 히트 상품이 등장했다. 바로 '후리스(fleece)'다. 일본의 화학 기업 도레이와 협력해 출시한 후리스는 19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가볍고 따듯한 보온 능력을 보여줘 단숨에 스테디셀러로 등극했다. 1998년 200만장, 1999년 850만장, 2000년 2600만장이 판매되는 등 유니클로가 성공을 거두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니클로는 먼저 옷을 만들고 색을 입히는 방식을 도입해 재고 상황에 맞춰 생산량을 도입할 수 있었고, 덕분에 1900엔이라는 저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후리스의 성공을 바탕으로 유니클로의 매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1992년 143억엔 수준에 불과했던 매출은 1998년 831억엔 수준으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2290억엔, 2001년에는 4186억엔으로 증가했다. 매년 두 배씩 성장한 것이다. 일본 시장의 성공에서 자신감을 얻은 야나이 회장은 2001년 영국을 시작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유니클로... 야나이 회장이 내린 처방은?

2000년대에 들어 유니클로는 성장 정체와 고객 선호도 감소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야나이 회장이 내린 결정은 제품의 고급화와 히트 상품 발굴, 그리고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가치 상승 전략이었다.

2001년에 들어 유니클로는 일본내 매장만 500여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성장하려면 해외 진출이 필수였다.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중국 하와이 미국 뉴욕 등 18개국에 1000여개의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해외 진출은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다. 영국에선 매출 부진으로 한때 21개에 달했던 매장을 8개로까지 줄여야했고, 중국 사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야심차게 진행한 야채 판매 사업이나 인수, 합병(M&A)도 제대로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02년 3442억엔에 도달했던 매출은 2003년 3098억엔으로 하락했다.

야나이 회장은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옷 생산 및 유통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제품 품질 강화와 히트 상품 재발굴에 나섰다. 2004년 9월 야나이 회장은 일본 일간지에 유니클로는 더 이상 저가 정책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에 광고를 냈다. 실제로 저가 정책을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저가 정책 때문에 고객들이 유니클로 제품의 품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다. 당시 유니클로는 최고급 캐시미어 스웨터와 오리털 다운 자켓 등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저렴한 가격 때문에 소비자들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도쿄, 파리, 밀라노 등 패션의 중심지에 R&D 센터를 설립해 우수한 디자이너를 기용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디자이너들을 활용해 현재 패션 트랜드에 맞는 상품을 기획하고, 고객의 요구를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각국 시장에 맞는 옷을 선보일 수 있었다.

도레이와 협력해 후리스의 뒤를 잇는 히트 상품 발굴에도 나섰다. 1만개가 넘는 샘플 제품을 만든 끝에 보온성을 강조한 의류 제품인 '히트텍'을 출시했다(실제 성능에 대한 논란이 조금 있다). 히트텍은 전 세계적으로 1억장이 넘게 팔리면서 후리스의 뒤를 이은 유니클로의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9년 유니클로는 자라, H&M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SPA 업계 빅3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유니클로가 직면한 또 한 가지의 문제는 브랜드 가치 하락이었다. 2000년대 말 유니클로는 일본 내에서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유니클로를 입고다니는 것이 부끄럽다는 뜻을 담은 '유니바레(ユニバレ)'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유니클로는 패션에 관심이 없거나 옷을 못 입는 사람이나 구매하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일본의 패션잡지들이 특집기사로 유니클로를 입은 것을 티내지 않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게재할 정도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는 결코 싸구려가 아니며 패션 리더들도 입고다니는 감각적인 브랜드라는 마케팅 플랜을 진행했다. 유명 모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어떤 옷에든 매칭할 수 있는 기본적인 디자인에 집중해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10년대에 들어 누구나 부담없이 입을 수 있는 브랜드 수준으로 인식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야나이 회장의 핵심 비즈니스 철학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도전정신'이다. 그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이키, 아디다스 등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가 장악한 스포츠 의류 시장에 도전하고 있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신규 상품 기획과 고객이 원하는 맞춤형 패션 상품을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비즈니스도 진행하고 있다. 2002년 야나이 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물러났다가 3년 만에 복귀한 바 있다. 당시 야나이 회장은 "유니클로가 안정만 추구하는 대기업병에 걸렸다"며 도전하지 않는다면 도태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사진=패스트리테일링 제공]


◆4차산업혁명시대, 디지털전환의 선봉에 선 유니클로

2010년대에 들어 유니클로는 IT기술을 접목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고 밝혀 이목을 집중시켰다. 야나이 회장은 2017년 초 도쿄 아리아케(有明)에 지상 6층 규모의 신사옥 '유니클로 시티 도쿄'를 공개하며 유니클로를 SPA 기업에서 '정보제조소매업'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IT 기술을 활용해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던 상품 기획 기간을 2주 이내로 대폭 단축하는 등 디지털전환(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1년 전에 기획한 상품을 판매하는 시스템 때문에 갑자기 닥친 따뜻한 겨울에 대응하지 못했고, 전년 대비 매출이 10% 가량 줄어든 문제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다. 고객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신체 치수를 입력하고, 색상과 디자인을 선택하면 10일 내로 해당 제품을 만들어 집으로 보내주는 맞춤형 주문 서비스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2017년 9월에는 인공지능 챗봇이 사용자에게 코디 및 트렌드를 제안하는 ‘UNIQLO IQ‘도 개시했다. 자신의 신체 치수에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추천해주고, 주변 매장의 재고 상황을 알려주는 인공지능이다. 추천받은 상품은 바로 구매할 수도 있다. 올해 초 유니클로 모바일 앱에서 모든 유니클로 회원이 이용할 수 있게 공개한 상태다.

이러한 인공지능 개발과 디지털전환을 진행하기 위해 약 1000명의 직원이 신사옥 6층에서 근무하고 있다. 칸막이가 없는 약 5000평의 공간에서 상품기획, 판매영업, 물류, IT 개발 등 다양한 특기를 갖춘 직원들이 협업 중이다. 야나이 회장은 "의류 산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이 정보산업과 서비스 산업으로 변하고 있다(=디지털전환)"며, "향후 유니클로의 경쟁자는 구글이나 아마존 등 디지털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전환을 바탕으로 유니클로는 2018년부터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이익보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더 많은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일본에서도 유명한 블랙기업... 성과주의의 폐해

모든 곳에 빛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니클로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굴지의 SPA 기업이라는 빛 뒤에는 블랙기업(직원들에게 혹독한 근무환경을 강요하는 기업을 뜻하는 일본의 비즈니스 용어)이라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야나이 회장은 철저한 성과주의로 유명하다. 그는 "경영자로서, 리더로서 나의 가장 큰 임무는 회사를 망하지 않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 당연히 조직원도 이를 따라야 한다. 꼬리를 움직여 몸통을 움직일 수 있다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이런 리더와 직원이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과주의 때문일까. 유니클로의 근무환경은 일본에서도 손 꼽힐 정도로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의 비영리 기관지 아카하타(赤旗)는 2014년 11월 발행한 ‘블랙기업을 쏴라!(追及! ブラック企業)'를 통해 유니클로의 가혹한 근무량과 야근을 고발했다. 이에 따르면 유니클로에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 가운데 절반이 3년도 채 안 돼 이직하고, 휴직자 절반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 단기계약직(아르바이트)의 절반 이상이 6개월을 채 버티지 못한다. 원래 유니클로 내규에는 월 최장 노동시간은 240 시간을 넘어설 수 없지만, 점원들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월 330 시간 이상이다. 유니클로 점포에는 약 40명 정도가 근무하는데, 이 가운데 정직원은 몇 명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단기계약직이다.

대졸신입 사원들은 6개월 정도의 교육을 거쳐 특정 매장의 점장으로 발령받는데, 이들은 관리직이기 때문에 단기계약직 관리를 위해 수십 시간을 추가로 일해도 잔업수당을 받을 수 없다.

이러한 아카하타의 고발을 두고 유니클로는 법원에 사실과 다르다고 소송전을 벌였지만, 법원은 보도가 사실이라 인정하고 유니클로의 주장을 기각했다. 유니클로의 근무환경이 최악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현재도 철저한 성과주의에 따른 많은 근무량을 요구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상태다.

물론 철저한 성과주의에는 나름 장점도 존재한다. 야나이 회장과 유니클로는 학력, 국적, 성별, 나이, 근속연수, 장애유무 등을 전혀 보지 않고 철저하게 실력만 평가해 승진 기회를 주고 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수십명의 직원을 이끄는 점장이 될 수도 있고, 불과 6개월만에 부점장에서 점장으로 승진할 수도 있다.

성과에 따라 1년에 두 번의 승진 기회를 주며, 당연히 주부나 고졸 사원에게도 대졸 사원과 동등한 승진 기회를 제공한다. 인사팀은 직원 개인이 작성한 목표 수치와 실제 성과를 비교 분석해 해당 직원의 향후 목표치와 보상을 함께 제공한다. 야나이 회장이 추구하는 철저한 성과주의에는 이러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한중일에 기대는 사업구조... 한·일관계 악화가 매출 부진으로 바로 이어져

최근 유니클로는 한국의 불매운동이라는 창사 이래 두 번째로 큰 난관에 부딪쳤다. 한국은 유니클로에게 세 번째로 중요한 시장이다. 유니클로의 한국 매장수는 작년말 기준 186개로 일본(831개)과 중국(633개) 다음으로 많다. 본사 임원이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두 번이나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도 한국이 그만큼 유니클로에게 중요한 시장이라는 방증이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유통업은 그 특징상 국가 관계가 악화되면 바로 매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중일에서 의류 유통 사업을 진행하는 유니클로는 특히 민감하다. 야나이 회장과 유니클로가 한중일에 기대는 사업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남아, 유럽, 미국 등에 매장을 확대하며 시장 다각화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동남아 지역 매출은 1400억엔으로 한국과 비슷하고, 유럽(900억엔), 미국(900억앤)에선 경쟁사에 밀려 성장세가 주춤한 상태다. 이대로 한·일관계 악화가 장기화되면 2020년 2조엔 매출을 달성하려던 야나이 회장의 계획도 무산될 수밖에 없다. 야나이 회장이 아베 정권의 무역보복으로 분노한 한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할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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